Euyoung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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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퍼블릭아트」 2019년 12월호


예술, 살아간다는 것의 방법


홍유영의 작업은 시적이다. 그의 작업의 형상은 단순하거나, 명료하며, 간결한 상태로 완결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작위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그만의 일정한 문법에 따라 어떠한 운율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한 형식의 순수성은 그 외면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깊고 넓은 의미의 함축을 투영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관객의 상상력을 극단적으로 자극한다. 문학에서는 단순명료한 단어나 구, 절 등의 문장 성분들을 조합함으로써 시라는 작품을 완성하지만, 시각 예술의 범주 안에서는 재료나 그 물성에서부터 매체까지를 아우르는 오브제나 평면의 파편들 혹은 그 조합을 통해 작품이나 전시를 구성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작가의 작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방식이 문학에서 시의 그것과 닮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홍유영의 작업은 어떠한 이유로 인해 시적으로 되어야만 했을까. 그는 왜,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기에 이러한 방법론을 작품에 투영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홍유영의 작업을 공간이나 용적과 같은 물적 영역과 이와 동기화하는 체계와 사상의 영적 영역(여기서는 정신적 영역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 그리고 개인 또는 집단의 삶이라는 인적 영역의 세 가지 벡터로 크게 구분해 조망한다.

물적 영역은 시각 예술에서, 특히 조각의 영역에서 주요한 요인이자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 우선은 각각의 재료를 가공한 후, 이를 원하는 물리적 형상으로 조형하며, 각 부분이나 전체를 이루는 최초의 구성요소로 완성한다. 여기서 적정한 수준으로 완성된 일부는 그것이 다시 작품이라는 상위의 개념을 완성하기 위한 또 다른 세공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데, 그 과정은 여전히 물적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기도 하거나, 때로는 그 영역을 이탈하는 개념적인 의미 부여의 행위를 거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과정이 종료되고 나서야 비로소 작품은 제 의지를 내재한다. 그제야 그 작품은 완성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일정한 정도로 어딘가를 점유함’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작품과의 상호작용에 있어 ‘일정한 정도의 점유’라 함은 다시 이것이 ‘특정한 단계를 형성하고 있음’과 동일하게 간주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홍유영의 작업 구축하는 계층을 한층 더 얇은 것으로 이해하게 하면서, 그 막들을 켜켜이 올려 만들어내는 어떤 오브제를 좀 더 (반) 투명하게 보이도록 한다. 이는 물적 침범을 통해 감상의 영역과 감각의 영역 사이를 흐리고, 동시에 비가시적인 영적 영역과 일상에서의 실천을 동반하는 인적 영역 등의 상이한 영역들을 자신의 작업 세계 안에서 공존하게 하는 효과적인 연결고리로 기능을 하게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가 오브제라는 물적 영역을 (반) 투명하고 얇은 레이어로 치환하여 작업을 구축하는 것은 분명히 이 영적 영역의 벡터를 작품 속에서 공존케 하기 위함일 것이다. 작품의 표면과 내부를 구분 짓는 구성 방식은 보통의 미술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반적인 형태이지만, 홍유영의 경우에는 그 접착의 정도가 비교적 더 견고하고 더 단단하게 결합하여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작가가 실제 그 장소성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재료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일 때 더욱 부각하며, 기존의 공간적 특성을 은유하는 표현의 기법을 적용할 때 역시 유사한 인상을 발산한다. 구체적으로는 그가 실제 그 장소에서 발견하거나 사용한 물건들을 작품의 일부로 위치시키거나, 실제 그 장소의 상황이나 맥락을 반영하는 성질을 작품의 구현에 적용하면서 이 효과는 더욱 극대화한다. 바로 이때, 물적 영역에서의 감각함은 그 자체로 발산하는 외적 의미의 한계를 지나친다. 그리고선 곧바로 작품의 안과 밖이라는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며, 이로써 영적 영역을 물적 영역과 함께 단숨에 꿰뚫어 이어낸다. 말하자면, 홍유영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우리는 단순히 그 외양이나 내면 어느 한쪽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며, 그 사이의 상호 동반적 상태를 전제하고 그의 작품을 마주해야 한다.

이렇듯 홍유영의 작품이 물적 영역과 영적 영역의 교차점 위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동안, 이를 창작하기 위한 작가의 삶과 이를 마주하며 회고하는 관람자의 삶은 작가 작업을 이루는 마지막 벡터로 자리한다. 지금까지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홍유영의 작업은 작업으로의 진입을 유인하는 오브제라는 물적 영역, 그리고 하나의 재료이자 소재로 역할 하는 이 오브제를 (또는 오브제와 오브제를) 엮어내면서 작업의 개념과 그 의미 시사를 도맡는 영적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는 작업 구축에서의 이 마지막 벡터를 이른바 인적 영역이라 명명하는데, 이는 두 영역의 앞단과 뒷간으로부터 이 전체의 영역을 관통하는 한편, 그 모든 가로지름의 출발과 종착을 도맡는다. 그의 작업에서 결국 모든 것은 삶으로 회귀한다. 삶은 나의 것을 지칭하기도 하고, 너의 것을 지칭하기도 하며, 우리네 그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먼저 내보임으로써 너와 우리의 삶을 상기한다. 작가의 작품은 곧 작가의 삶의 일부이거나, 적어도 우리 삶의 일부이다. 그 일부의 경험은 우연으로 일어났었거나,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자신에게 타인의,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돌이키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남아 있는 사실은 모든 것이 뒤섞인 상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끝으로, 나는 상기의 서술 방식으로 인해 혹여나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발생할 수 있는 오해나 몰이해의 여지를 지워내며 글을 맺고자 한다. 나의 비평은 홍유영 작업을 구성하는 요소를 세세히 뜯어 나열하고 있지만, 그것은 작업의 구성요소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뒤섞여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내가 홍유영의 작업을 위치시킨 교차의 지점, 즉 물적 영역과 영적 영역 그리고 인적 영역은 모두 다르지만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그 차이보다는 이 영역들 사이를 마찰시키고, 융합하며, 연결하는 작가의 방식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위의 여러 영역을 작가의 작품을 구축하는 벡터로 인식하는 동시에, 이 모든 구조의 처음과 끝에 삶이 있다는 나의 비평은 작가의 혹은 작가에 의한 작업의 방법론이 작가의 혹은 작가에 의한 삶의 방식과 같을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우리의 혹은 우리에 의한 삶의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 장진택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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