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cmrlchtdj - 홍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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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홍유영
“어의 순서나 존재를 합리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언어적인 것이며 가설적으로는 이미 ‘도서관’의 어느 곳엔가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 그 단어는 신성한 ‘도서관’이 예견하지 못했고, 그들의 비밀 언어 중 그 어떤 것에도 무시무시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11(원사: 1944), p.107]
공간은 많은 경우 만들어진 상태로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우리가 직접 들어가 볼 수 없는 공간들은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특히 (타인의) 주거공간의 경우 내부를 볼 수 있는 경우가 극히 한정적인 경우가 많고 도시공간에서 열려있는 공간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많지 않다. 빽빽하게 들어선 수많은 공간들을 지나치면서 비슷한 외장으로 뒤덮인 건축물들은 우리 시야에서 쉽게 빠르게 사라지곤 한다. 이번 개인전 《dhcmrlchtdj》에서는 재건축 과정에서 해체되는 찰나에 발견되는 공간들의 다양하고 새로운 면들을 좀 더 들여다보며 집중해 본다.
50년 가까이 긴 세월을 담고있는 66개의 아파트 건물로 이루어진 큰 단지 안을 가로질러 발걸음을 멈춘 곳은 그곳에 사는 동안 가까이서 오랫동안 관찰해본 적이 없었던 한 아파트 건물이다. 바로 앞 동은 건물의 일부를 부수고 있었고 요란한 현장의 굉음과 온몸을 뒤흔들며 울리는 진동 한가운데 올라선 계단 끝에는 형형색색의 다른 공간들이 각층마다 펼쳐지고 있다. (2022)은 작가가 살던 단지 안의 다른 거주자들의 공간을 촬영한 사진작업들이다. 오전을 지나며 정오에 가까워 오던 시간, 구름 한점 없던 하늘에서 내리는 강한 햇빛을 받아 공간 안의 널브러진 각기 다른 모양의 유리 파편들과 거울조각들은 마치 오래 갖고 있던 귀금속 상자를 떨어뜨린 것 마냥 바닥에서 모래알같이 흩어져 들어오는 모든 빛을 흡수한 듯 한없이 반짝이며 공간을 채운다. 철거가 진행 중이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붙박이 가구 부분들과 예전의 색들을 머금고 있는 다양한 색감의 벽지들은 외부의 삭막한 공사현장의 상황과 대조가 되면서 그 색들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강하게 발산된다. 내부 공간에 들어서자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르고 주위의 소음이 점차 잔잔해지면서 각각의 공간이 온 힘을 다해 내뿜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한때 거주자들이 살고있을 때는 낯선 이들의 공간을 들어갈 수 없어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여러 실체 없는 공간들이 마침내 해체가 되는 찰나에 그 닫혀있던 비밀의 문들이 모두 활짝 열리면서 눈 앞에 펼쳐진다.
전시 공간을 들어가자 바로 보이는 큰 벽면에 길게 설치된 (2022)은 10개의 흑백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작가가 실제로 살던 집이 석면 철거를 위해 백색의 비닐 소재 보양재로 공간을 한치도 빠짐없이 전부 싸는 순간을 담은 작업이다. 흰색으로 온통 덮인 내부공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벽을 감싸며 공간 전체를 휘감으면서 무한대로 확장이 된다. 철거된 큰 거실 창문을 통해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은 창 앞을 바로 가로막고있는 흰색 보양재에 빛이 투과되면서 마치 거대한 조명을 켜놓은 듯 실내를 밝혀주고 비닐 특유의 재료적 특성으로 보양재 표면의 반짝임은 시각을 따라다니며 계속해서 움직인다. 급격하게 변하는 도시공간을 마주하게 되면서 언뜻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픽션들(Ficciones)>(1944)에서 육각형의 구조로 무한(unlimited) 하지만 주기적(periodic) 질서를 갖고있는 바벨의 도서관(The Library of Babel)을 떠올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공간을 서술하는 텍스트들에 관심이 많은데 특히 이 도서관은 특정시기에 인간이 만들어놓은 공간 이라기 보다는 태곳적부터 존재해오던 공간으로 묘사되어 그 실체에 대해 우리는 전부 알 수 없는 특징이 눈길을 끈다. 도서관의 건축적 구조는 육각형으로 되어있는 벽면 중 네 면에 각각 다섯 개의 책장이 채워져 있고 이러한 진열실은 다른 진열실과 열려있는 구조로 무한대로 연결이 되어 펼쳐진다. 오랜 기간 살았던 공간이 해체되는 순간 목격되는 공간의 다양한 모습들은 마치 바벨의 도서관이 무한 하지만 주기적인 질서로 존재하는 모습과 사뭇 중첩된다.
다른 쪽 벽면에 설치된 (2022)는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모든 철거 과정은 건축물을 철거하기 전 주변의 나무와 식물 그리고 정원과 놀이터들이 먼저 철거, 폐기 또는 이식된다.) 한 때 오래된 아파트 정원의 한 모퉁이를 50년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던 큰 돌을 전시장으로 가져와 설치한 작업이다. 종잇장같이 얇고 긴 직사각 형태의 스텐레스 판재가 큰 돌 아래 바닥을 지나 전시장 한쪽 코너와 맞닿으면서 방향을 틀어 벽면을 타고 올라가면서 선적 구조가 전시장의 벽면으로 이어지도록 설치한 작업이다. 바위나 돌들은 주거환경을 시각적으로 장식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어 왔던 재료들이며 이들은 도로와 정원을 구분하는 등 공간적 지표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공간적 지표를 수행하던 돌은 옮겨진 다른 공간에서 그간 잊고 있었던 그것이 본래 갖고있는 물리적 무게감에 집중하면서 또다른 공간 질서를 만들어낸다. 인성(touchness)은 금속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파손되거나 충격에 잘 견디는 성질, 즉 휘거나 또는 구부렸을 때 금속이 그 힘을 버티는 저항의 정도를 이야기 한다. 이러한 인성이 큰 스텐레스 판재를 좁게 절단하여 구부리고 그 구부림의 정도가 최대치에 달하는 지점에 구조를 고정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공간을 확장시킨다. 사물과 재료 등 대상이 갖고 있는 내재적 특성을 외부로 끌어내어 재료의 힘과 움직임 또는 그 저항하는 (물질적 또는 비물질적) 힘이 최대치인 지점을 찾는 과정은 곧 그 물질의 내부에 내재된 다양한 시간들을 우연한 찰나에 발견하게 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재료를 계획에 맞게 미리 재단하여 목적에 맞게 구축하는 일반적인 건축 방식과는 아주 다르다. 유연한 건축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유연한 건축법(Flexible architecture)은 그 형태, 구조,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상호적 관계가 중요하다. 이러한 상호적 관계는 우연성과 즉흥성에 기반하지만 우연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즉 기존의 대상이 갖고있는 질서나 규칙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이해 되기도 하는데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사고 과정 속에서 그 움직임과 구조를 예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도출되는 지점에 대상을 포착하여 파악하고 변화시켜 구체적인 형상과 관계를 새롭게 결정하며 만들어 준다.
호르헤스가 서술한 바벨의 도서관은 세상의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 동일한 책은 한권도 없지만 수십만 권의 불완전한 복사본이 존재하며 책 커버에 박힌 글씨는 책 내용을 지시하거나 예시하지 않고 책의 내용 또한 태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어떤 언어에도 속하지 않아 불가해하다. 수많은 책들 중 한권에는 내용도 없고 장황하게 길게 늘어놓은 글이 있다. 글자의 조합이나 의미 또는 발음까지 불가능한 글자들의 집합체가 도서관 안의 책들 중 한권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마치 도서관이 예견하지 못한 의미 없고 조합이 불가능해보이는 글자들의 존재처럼 사물이나 공간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확신은 “우리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거나 환영적인(phantasmal) 존재”로 만드는 듯 보인다. 반복적 변화가 일어나는 일상 속에서 그 중 (물질적 또는 비물질적) 해체가 되는 과정 속에서 공간이나 사물들을 좀 더 들어가 보면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발견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있던 특정 단어나 개념으로 명명할 수 없는 순간이나 공간 또는 대상이 분명 존재하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의식과 감각을 정해진 질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만들어 가게 된다. 이러한 지점을 찾아가는 탐구는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된 (2022)에서도 보여진다. 이번 전시 공간은 을지로의 오래된 건축물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전시장의 전면에 자리한 큰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의 움직임이 인상적인데 이러한 전시공간이 갖고있는 특수한 장소적 특성들을 이끌어내어 작품에 연장시켜 본다. 오랜 기간 거주했던 아파트 단지에 나무들은 많은 경우 1970년 경 아파트가 건축되던 시기에 심어져 그 높이가 아파트보다 클 정도로 건축물과 세월을 함께하며 점차 공간적으로 지각된다. 철거 과정에서 수집된 폐기된 오래된 나무 밑동과 몸통들은 실버 크롬으로 도색이 되어 거울 또는 금속의 성질을 드러낸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나무의 표면들은 공간적으로 지각되는데 주변 공간을 끌어 담으며 표면 굴곡에 따라 공간을 변형하며 반영한다. 전시장 중앙에 매달린 여러 개의 스텐레스 메쉬들은 눌리는 힘과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곡선의 움직임과 공간의 깊이 및 형태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연한 금속 라인은 금속 자체가 갖고있는 단단한 재료적 성질을 뛰어넘어 상당히 유연한 형상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반짝임을 덧입고 얇은 스텐 와이어와 체인에 연결되어 거울 같은 나무 조각들로 공간이 확장된다. 움직이는 시각에 따라 드러남과 사라짐이 불분명하게 반복되는 구조는 우리의 감각과 의식을 긴장감과 유연함 사이를 오가며 지속적으로 확장시키며 그간 명명되지 않았던 그 “어떤 공간”과 마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