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tectonics - 홍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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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Material and Structure in Urban Space
2023
홍유영
“여기서 분석되는 것은 분명 결코 언설의 최종적인 상태들이 아니라, 최후의 체계적인 형태들이 가능하게 하는 체계들, 그에 관련해 최종적인 상태가 (체계의 출생 장소를 구성하는게 아니라) 그의 변이체들에 의해 정의되는 전최종적인 규칙성들인 것이다. 완성된 체계의 배후에서 형성들의 분석이 발견해 내는 것, 이것은 생기하는 생명 자체, 아직 포착되지 않은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체계성들의 거대한 두께, 복수적 관계들로 차있는 총체인 것이다.”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 (원사: 1969), p.115-116]
인간은 공간을 만든다. 만들어진 공간은 본래 계획한 목적과 체계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기능하며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 어떤 공간이 공간으로서 공간성(spatiality)을 갖는다는 것은 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공간성이라는 것은 공간이 공간적 성질을 갖는 특수한 조건을 말한다. 공간적(spatial)이라는 것은 입체적(three-dimensional)이라는 것과 관계는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동일시되어 해석되기에는 생각보다 관계가 복잡하다. 이번 개인전 《Architectonics (건축술)》에서는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 있던 건축물이 차츰 해체되는 순간에 발견되는 공간을 형성하는 새로운 요소 또는 규칙성들을 발견하고 밖으로 끌어내면서 완결되지 않은 거대한 두께의 공간의 형태들을 감각의 층위로 올려 들여다본다.
전시장을 들어서자 바로 보이는 큰 벽면에 설치된 (2022)은 서울의 한 철거 현장에서 수집한 여러 개의 실제 나무 몸통과 밑동 등을 일부분 조각하고 표면에 백색 우레탄을 올려 서로 떨어져 있지만 연결이 되는 듯 벽면 위에 길게 설치한 작업이다. 작가가 최근까지 거주했던 거주지가 재건축으로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그곳에서 50년 가까이 자란 나무들이 이식되는 나무와 폐기되는 나무로 분류되고 여기서 폐기되는 나무들을 계속해서 수집해 왔다. 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은 많은 경우 1970년 경 아파트가 건축되던 시기에 심어져 그 높이가 아파트보다 클 정도로 건축물과 세월을 함께하며 점차 공간적으로 지각된다. 수집된 나무들의 부분들을 오목하게 깎아 부드러운 면이 되도록 조각을 하여 나무의 원래 형태와 조각한 부분이 연결되는데 매끈하게 깎인 나무의 끝부분들은 각기 다른 나무의 형태가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간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방식으로 전시장 벽면에 배치된다. 백색 벽면에 설치된 백색 나무들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의 흐름에 의해 나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볼륨과 음영에 의존하여 그 형상을 드러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면서 일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공간적 흐름을 만들어 준다. 오랜 기간 특정장소에서 나무가 갖고 있었던 나무 각각의 고유한 특이성들이 만들어내는 사물의 표상(representation) 즉 그 유한성(finitude)들은 나무 표면이 전부 백색으로 탈색화(decolourization) 되면서 유한성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대상과 인간 그리고 공간 사이에서 확립되는 불안정한 외부적 관계가 개입되면서 새롭게 드러나는 형상에 집중하게 만든다.
“아무리 단순한 것일지라도 질서를 확립하는 데에는 ‘요소들의 체계’가 필수 불가결하다. 가령 유사성과 차이가 나타날 수 있는 선분의 규정, 이 선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변이의 유형, 끝으로 위로는 차이가 있고 아래로는 유사성이 있게 되는 문턱이 절대로 필요하다. 질서는 사물들 사이에 사물들의 내적 법칙으로 주어지는 것이자, 사물들을 이를 테면 서로 바라보게 하는 은밀한 망이고, 이와 동시에 시선, 관심, 언어의 격자를 통해서만 존재할 뿐이며, 오직 이 격자의 빈칸들에서만 표명의 순간을 말없이 기다리면서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듯이 심층적으로 드러난다.” [미셀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원사: 1966), p.14]
푸코는 <말과 사물(The Order of Things)>(2012)의 서문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The Analytical Language of John Wilkins)>(1942)의 텍스트 중 중국백과사전에 대한 글에 대해 여러 페이지를 통해 언급하며 인간이 만드는 지식 체계와 사유의 구조주의적 한계점을 주목하고 우리가 친숙했던 사유의 방식에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단순히 신화적인 동물이나 기괴한 동물의 등장으로 인한 알 수 없음 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의 마주침에 대한 것이 아닌 실재 존재하는 것과 상상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나란히 놓일 수 있는 그 질서의 기괴성 또는 기묘함에 주목한다. 또한 전혀 다른 존재물들을 서로 연결할 “공통의 바탕”이나 “사물들이 인접할 수 있는 장소의 부재”를 강조한다. 사물과 공간을 지각하고 의식하는 것은 어쩌면 푸코가 언급한 것과 같이 공통의 장소의 부재 속에서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을 찾아 열어놓는 행위로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은 사유가 부재하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선험 되고 필연적인 연쇄적 관계에 의해 사유되는 사유의 일관성에서 벗어난 지점을 말한다.
이렇게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은 만들어진 공간들이 해체되는 찰나에 자리잡고 있던 모든 질서가 필연성을 지우고 병치될 수 없는 자리로 돌아갈 때 극대화 된다. 철거 중인 한 건물의 계단을 올라 계단 끝의 열린 문을 통해 바라본 실내의 풍경은 그 공간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오전을 지나 정오에 가까워 오던 시간,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서 내리는 강한 햇빛을 받아 공간 안의 널브러진 각기 다른 모양의 유리 파편들과 거울조각들은 마치 일렁이는 푸른 바닷물결이 햇빛에 부딪혀 반짝이는 것 마냥 바닥에 흩어져 들어오는 모든 빛을 흡수한 듯 한없이 반짝이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022) “각이 진 유리”와 미술관 미디어 룸에 설치된 (2023)라는 제목의 거울 작업에서는 실제와 상상의 간극에서 드러내는 물질의 새로운 질서와 형상을 그려내 본다. 재건축 현장을 관찰하다 보면 폐기하는 유리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현장 곳곳에서 수집한 다양한 형태의 투명한 유리들을 전부 작은 조각 형태로 잘게 부수고 모아서 네 면의 모퉁이를 지닌 형태를 만들고 중앙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높이가 올라가는 새로운 공간 구조의 각이 진 유리가 만들어 지기도 하고 각기 다른 형태로 잘게 부순 거울들을 빛의 반사를 통해 물질적 공간의 확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공간이 갖고 있던 질서를 벗어나 해체되는 순간 마주하는 물질의 형상은 간혹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던 것에서 벗어나면서 많이 다르기도 하다.
재건축 과정에서 공간은 한번에 철거되는 것이 아니라 단계에 따라 공간이 차츰 해체되어 간다. 내부 인테리어를 철거하는 단계에서는 건축물 메인 구조에 붙어있었던 다양한 종류의 공간들이 떨어져 나가 건물 외부에 마치 벗겨놓은 공간의 껍질처럼 힘없이 쌓여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2022)는 철거 중인 한 공간에서 발견한 수납장 문들을 가져와 기하학적 형태로 절단하여 다양하게 잘려진 부분들을 연장시켜 전시 공간에도 일부 설치하면서 열린 입체적인 공간 구조로 확장 시킨다. (2022)와 (2022) 그리고 (2022)에서는 수집한 오브제나 나무들이 기존의 형태와 질서에서 벗어나 특정한 방식과 질서로 공간이 확장된 형태를 발견 할 수 있다. 사물이나 공간이 어떤 덩어리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마치 그 덩어리에 얇게 붙어있었던 껍질을 벗겨 놓은 것처럼 힘없이 쌓여있는 사물이나 공간 상태는 물질이 만들어진 상태 중 가장 연약해진 상태로 보여진다. 이렇게 연약해진 상태의 물질을 이리 저리 건드리다 보면 쉽게 늘어나는 (물질적 또는 개념적) 지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사물들 사이의 질서나 사물의 내재적 규칙성 또는 공간성을 확립하는 것은 존재물의 불연속적인 지점을 찾는 것과 분명 연관이 있다. 공통성을 상실한 이 불연속적인 지점은 푸코가 말하는 “분류상의 왜곡” 또는 “균질한 공간이 없는 도표”를 만드는데 상당히 적합한 공간적 조건이 된다.
전시장 중앙에 놓인 길이 6미터의 거대한 플랫폼 위에 설치된 (2023)는 “잃어버린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으로 묘사된 “불면증”이라는 보르헤스의 단어를 떠올리며 도시공간의 생산과 소멸의 간극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질서를 시공간적으로 재해석한 설치 작업들의 연작이다. 좁은 간격으로 절단한 얇은 스텐레스 판재를 길게 전시장 천정에서부터 설치하여 스텐레스 라인 하나하나가 공중에서 움직이듯 내려오면서 보일 듯 말 듯한 공간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 공간구조는 눈으로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가늘지만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순간 드러나게 되는 좌대 위의 얇은 스텐레스 와이어로 확장되면서 철거현장에서 수집한 여러 오브제들 사이를 지나며 연결된다. 이렇게 얇고 가는 시각적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공간은 시각적인 것과 비시각적인 것의 경계의 끝부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몸에 있는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게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내기도 하고 서서히 사라지며 불연속적인 지점을 지속적으로 만든다.
사물과 공간의 지각과 사유는 대상의 최종적인 상태나 최후의 형태를 구축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이렇게 사물과 공간이 최종적인 상태나 최후의 형태를 벗어난 상태에서 존재한다면 이러한 사물과 공간들을 사유가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주목해 본다. 사물과 공간은 일련의 내재적 또는 외재적 질서의 관계를 통해서 그 사물성과 공간성이 변화하고 드러난다. 이러한 질서는 푸코가 언급한 “세력 관계의 영역에서 전술적 요소 또는 연합(tactical element or blocks operating in the field of force relations)”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불균질적이며 다공성 구조 체계를 통해서 불안정한 작동을 하며 “한결 같지도 항구적이지도 않은 일련의 불연속적 선분” 위에 대상의 배치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질서를 통해 사물과 공간은 확장되거나 감소하고 느슨하거나 긴장하고 노출되거나 사라지게 되면서 요소들의 체계를 기획하는데 이것이 사물과 공간을 구축하는 또는 사유를 변환하게 하는 건축술(Architectonics)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