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이는 것을 거의 안-보이게 보여주는, 시각성의 기예 - 양효실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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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정체성의 가내 예시들, 가구
‘콘크리트 공화국’ 한국의 시민들이 ‘원하는’ 주거 형태인 아파트나 빌라가 등장하면서 가내 공간을 분할하는 새로운 이름들도 생겨났다. 안방, 거실, 서재, 다이닝룸, 작은 방 같은. 그리고 그 공간들에 획일적으로 들어가 비치되는 가구들, 가령 침대, 의자, 책장, 테이블 같은(요즘 신축 아파트에 붙박이로 설치된 장롱은 뺀다) 이름들이 있다. 사람이 앉거나 눕는 침대나 의자(소파는 대체로 나무로 만든 게 아니니 뺀다), 물건을 놓거나 넣는 책장, 테이블, 식탁과 같은(나무로 제작된 가구만 한정한 것은 홍유영의 입체 설치의 “파운드 오브제”가 주로 목재 가구들이기 때문이다). 가구는 목적이 분명하고, 기능에 최적화된 형태여서 우리는 그것들의 이름을 단박에 식별할 수 있다. 가구는 기능-목적이 곧 이름이고, 좋은 재질의 나무인가 상표가 무엇인가 등등에 따라 가격에서 차이가 날 수 있다. 미니멀한 가구도 있고, 장식으로 기능을 덮어서 화려할 수도 있고 심지어 주인, 대체로 안주인의 취향이나 미감을 엿볼 수 있는 가구도 있다. ‘이참’(이사해서, 곗돈타서, 지루함을 못견디는 변덕에)에 싹 교체했을 수도 있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그 가구가 그 가구다. 가구는 음미의 대상, 모셔놓은 신주단지가 아니다. 눕다-앉다-넣다-놓다와 같은 행위를 보좌하는 엑스트라-세팅으로서 금방 안 보이게 된다. 안 보여야 좋은 가구이다. 눈에 거슬리거나 눈을 압도하는 가구는 잠시 ‘사물’일 수 있지만, 곧 가구는 제 자리, 제 기능에 합치되면서 눈 밖에 날 것이다. 가구의 일생은 나사-관절이 삐걱거리거나 휘거나 바래거나 유행에 뒤지거나 안주인이 변심하면 끝이다. 가구에 이야기가 들러붙을 수도 있지만, 물신이 되어 안주인의 사랑이나 욕망을 전담하는 것들도 있겠지만, 아파트나 빌라에 비치된 가구는 소모품이기 십상이고, 아파트의 수명이 고작 삼십년 정도이니 가구의 일생은 더 짧은 게 당연지사다. 가구만 놓고도 우리는 근대가 요구한 정체성들, 사회적 효용성과 경제성에 맞춰 구조화되는 이름들의 일생을 일별할 수 있다. 이름으로서의 정체성은 불려지고, 쓰여지고, 잊혀질 수 있어서 정체성이다. 정체성은 ‘그것’의 고유한 본질이나 실체로부터가 아니라 그것의 사회적 가치나 용도로부터, 말하자면 바깥으로부터 부착된 것이다. 정체성에서 결국 삐져나오고 있는 타자성의 잔여를 고려하거나 배려하는 임무는 반사회적-위반적 글쓰기가 전담할 것이다. 예술은 이름-정체성의 노동, 피로를 폭로하거나 정체성의 경계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타자성에 반응하는 사회적 행위이다. 한낱 가구를 갖고, 근대적 건축에서 가장 사적이면서 집단적인 장소인 집의 미미한 물건을 갖고 근대성의 비가시적 구조를 문제화하는, 폭로와 비판이라는 실천적 행위를 가장 안쪽에서, 가장 비정치적 소재를 갖고 하고 있는 홍유영이 등장할 때이다. 여성적 오브제인 가구에 대한 홍유영의 개입은 등가성, 기호의 대체가능성, 상품의 교환가능성에 기반한 근대의 비가시적 구조를 재고하고, 이름에 갇혀 있던 물건에서 물건을 뜯어내 사물로 옮겨놓고, 친밀함과 낯섬이 중첩된 사건성을 일으키려는 데 바쳐진다. 장인의 손길이 녹아있거나 노동자의 노동이 숨겨진, 부르주아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엿볼 수 있는 가구가 조각을 전공하고 입체설치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홍유영의 손길을 거쳐 다음-생을 얻는다.
2. 외부성으로서의 사물들의 함께있음
박수근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Neither Abstract nor Universal》은 홍유영에 의하면 모두 “도시공간 속 폐기물”인 가구가 소재다. 홍의 집이나 작업실 근처에 버려진 가구들, 재활용되거나 불태워지기 직전 “가장 취약한 때”에 물건들이 홍의 눈에 들어오고 “파운드 오브제”로 재명명되면서 다른 맥락으로 들어간다. 홍의 오브제는 개념적 해석을 거쳐 전시장에 놓인 레디메이드도, 냉소나 유머를 입은 키치적 대상도 아니다. 상품은 헤지고 낡고 상한 것, 가령 고가구나 유물이 일으키는 이야기가 부재한다. 상품은 뻣뻣하고 맨질맨질한 표면-기호일 뿐이다. 이야기가 불가능한 상품은 익명이고, 비인간적인 대량생산품이다. 현관문을 벗어난 고가구나 유물이 들려줄 이야기의 미디움을 자처하는 작가들이 있고, 레디메이드의 작위성과 반복성을 선택하는 작가들이 있다, 물론. 홍이 선택한 “폐기물”은 목재가구이고, 대체로 이야기가 붙지 않은 근대적 산물이고, 키치나 포스트모던 패러디의 맥락으로 끌어들이기 어려운 전근대적(?!) 물성을 갖고 있고, 남성 작가들에게는 관심을 끌지 않을 여성적 오브제라는 특수성을 보유한다. 가구를 매일 쓸고 닦았을 여자들이 어른거리는 것이다. 안 보이는 노동들, 하찮은 가사 노동들이 버려진 가구를 줍는 여성 작가 홍이 읽은 근대 안의 비가시적 노동들이었을지 모른다. 안 보이는 것을 보는 집중이 홍의 수행이고 잘 안 보이게 만드는 게 홍의 장기이다.
작업실로 들어온 가구를 놓고 홍은 계속 응시한다. 일생 자신에게 할당된-강요된 역할에 종속되었던, 이름에 갇혀 있던 물건을 응시한다. 그것에서 그것임을 보면서 그것-아님을 동시에 보는 빈 시간을 개방한다. 대화이고 침묵이고 수행이다. 물건을 넣고 놓고, 사람이 앉고 눕는 데 바쳐진 가구의 수동적 삶에서 가구를 뜯어내고, 그것을 가급적 사물성-타자성으로 돌려놓기. 들뢰즈를 자주 인용하는 홍을 따라 말한다면 그것의 잠재태를 끌어내기 위해 그것의 현실태를 조금 밀어내기. 기호로서의 도구성뿐이었던 존재에게 무목적적 유희나 시각적 리듬을 선사하기. 홍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 메시지를 가구에 투사하는 게 아니라, 가구에서 가구를 초과하는 것, ‘강도’나 ‘다양체’를 발견하기 위해 자신도 내려놓는다. 혹은 가구들이 리좀적으로 연결되는 수평면을 찾아내려고 그것들 안에, 아니 사이에 이미 들어가 있다. 가구의 그것임과 그것아님을 동시에 보는, 가구들의 관계 속에서 가구들을 이접적이고 연접적인 방식으로 종합하는 홍의 독특한 스타일, 비스듬하게 보고 개입하는 노동이 이제 등장할 것이다.
홍은 절단기를 들고 자른다―가구의 관절을 푼다―전체를 희생하고 부분을 획득한다―잔여를 남기고 개념을 제거한다. 가구를 가구이게 만든 면이 잘려 나간다. 놓고 넣고 앉고 눕는 기능을 전담한 면을 빼고 선을 남긴다. 목적론적 위계를 해체한다. 파운드 오브제는 이미 훼손되었고, 관건은 개체성을 잃은 물건들을 연결하고 종합하는 흐름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끄집어내려는” 홍의 욕망은 사물을 개념에 욱여넣었던 근대적 노동을 중지시키고, “뼈대만 남기는”, “덩어리감을 덜어내는”,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설 수 없게 만드는” 노동, 선재하는 법이나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무로부터의 노동으로 물질화한다/된다. 능동과 수동의 중첩. 사물은 인간으로서 작품을 관람하려는 관객의 욕망에도 걸리지 않는 것이고, 시(詩)로부터도 멀어지는 것이고, 근대적 시각체제를 중지시키는 것이기에 사물에 대적할 말, 반응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흐물흐물해지고”, “힘이 빠졌고”, 단단한 목재이면서 파편화되어버린 홍의 사물들은 조성된 내부로서의 외부성 덕분에 하나이면서 다양체이고 자기이면서 타자인 채로 취약해지고 맑아져간다.
홍은 노동집약적인 공정을 거쳐 자기임을 거의 잃은 가구들, 혹은 사물들에게 아이보리 페인트를 칠한다. “전시공간의 비가시적 구조인 흰색과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차이”를 주려는 홍이 발견한, “원래 흰색이었던 가구가 빛의 영향으로 황변한 상태”라는 물질성-시간성을 차용한 것이다. 샌딩을 통해 맨질맨질해진 ‘파편들’은 아이보리색을 입음으로써 홍의 주관적 맥락에 안착한다. 소속과 정체성이라는 사회적 표준을 제거하는 마지막 노동이다. 이제 홀로 설 수 없는, 홀로 자기일 수 없는 파편들은 서로에 의지해서, 관계적으로, 마치 ‘패치워크’처럼 공동존재한다. 전시장에 들어선 것은 개체가 식별되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 조각인 것이다. 그렇다고 완성이나 자기지시성은 부재하는, ‘끝’이 불가능한 하나의 전체. 흐름이어서 사실은 계속 뻗어나가고 있는. 다른 장소에서는 다르게 배치되어 있을. 그래서 홍은 이들을 복수명사 “사물들(Things)로 부른다. 쓰러져 있고 모로 세워져 있고 쌓여 있고, 부재하는 면은 투명한 유리가 대리보충하고, 도대체 조각으로 안 보여서 누가 건드리면 와장창 무너질 것 같고, 이것이 원래 무엇이었는지를 너는 알아 맞출 수 있겠느냐고 나의 알아보고 자리를 정해줘야 편안해지는 주체성을 힐난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트라우마나 우울을 통해서 현시하는 사물성의 폭력성으로부터는 우리를 조금 보호하는 것 같은 이 전시를 놓고 홍은 짧은 글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사물과 공간들 사이, 자신과 타자, 대상과 주체 사이의 특정한 위치관계를 새롭게 드러내는 것은, 빈칸의 논리, 즉 거주된 공간의 공간적 정렬과 시선, 포함과 배제의 권력적 상호 관계 및 구조 그리고 끊임없이 생성하고 이접하고 분배하는 기술적 변환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고 적었다. 우리는 본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지? 보이도록 주어진 당연한 것들이 슬쩍 보이고 읽히지만 동시에 기괴한, 언캐니한, 신중한 의도 속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이 예술 앞(?!)에서 우리는 방전된다. 이것은 여전히 차갑고 몰개성적인 표면이고, 이야기를 입힐 수 없는 기호-상품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안 보이는 것들을 보이게 하되 거의 안 보이게 하려는 홍의 내기, 보이는 것들이 안 보여서 결국 보고 읽기의 관성이 흐릿해지는 이 유혹을 즐기는 데는 말도 눈도 감각도 좋은 방편이 아닌 듯 하다.
벽면에 의지해 ‘선(線)’이, 일견 책장이 원본이었을 것 같은 데 어디를 인용하고 수정한 것인지 영 확신이 서지 않는 조각이 벽을 타고 내려와서 바닥으로도 포복 중이다. 천장에 고정된 채로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여기저기서 잘라낸 선들을 이어 붙여 만든 곡선은 딱딱하게 부드럽다. 제자리가 어디였는지 알 수 없을 이 부분들, 자르고 이어서 계속 자기-증식 중인 부분들은 자라나고 움직이는 식물이나 벌레를 미메시스하는 듯도 하다. 동일성의 세계란 사실은 모든 것들이 목적도 의미도 없이, 상호관계 속에서 오직 변화하고 있을 뿐인 생성-흐름의 세계에 살짝 덧씌워진 베일에 불과하다면, 그 베일 아래에는 홍이 우리에게 제출한 이런 뒤섞이고 뒤얽힌 사물들의 배치가 있는 것이다. “추상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은”이란 홍의 전시 제목이 가리키는 게 아마 그런 장소, 세계, 흐름일 것이다. 추상이나 보편이라는 거대한 그물로는 잡히지 않을, 불안과 기이함이 스멀스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거기 사물들의 공동존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