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young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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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에워싸는 목소리들 - 이진실 미술비평/미학

  • 커다란 상아색 판재가 흘러내리듯 매달려 있다. 가느다란 금속 튜브들이 거미줄처럼 엉켜 부유한다. 이번 전시《Silence Between Structures》에서 홍유영이 벌여 놓은 구조물들은 각자 견고하면서도 취약해 보인다. 벽에 기대거나 공간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정지된 역동성을 자아내는 금속, 유리, 나뭇가지 조각들은 어느 정도는 일관적이면서도 미시적으로는 일관적이기보다 터무니없기에 완결된 '형상’의 표식으로 보이지 않는다. 홍유영은 이처럼 조각의 형상보다는, 형상과 배경 사이를 진동하는 사물들의 희미한 잔존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힘으로 제시한다.


    전시장에서 그녀의 구조물들을 만날 때, 우리는 이것들의 원천이 철거되는 주거 공간이나 버려진 가구에서 왔다는 것을 간파하기 힘들다. 얼핏 보아 이것들은 통상의 산업적 제품의 자취를 거의 지니지 않은 것 같고, 어떤 의지로 혹은 어떤 표현적 방식으로 창출된 ʻ작품’의 매끈함과 고요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가가 가까이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시간의 흔적으로 녹이 슨 표면, 잘라내고 새롭게 접붙인 변형의 흔적들이 선연하다. 기실 홍유영은 20년 가까이 버려진 사물들의 절단, 해체, 재조립을 통해 비정형적이고 이질적인 구조를 탐색해왔으며, 특히 철거 현장에 파손된 유리부터, 색이 바랜 목재 가구들, 녹슨 철이나 스테인레스 강선 등을 세심하고 집약적인 노동의 과정을 거쳐 ʻ하이브리드적’인 오브제들로 변신시켰다. 그래서 이 혼종체들은 순수한 미적 오브제의 지위를 제 운명으로 삼은 것들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무심하게 지나치는 일상, 특히 도시 환경에서 마주하는(그러나 결코 의식적으로 쳐다보지 않는) 구조의 틈을 주시하고, 거기에서 분자적이고 파편적으로 작동하는 노이즈를 일종의 비가시적 실체로서 감각의 층위로 밀어올린 것이다.


    홍유영의 조각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자기만의 체적과 위치를 지니고 있던 이 사물들은 잘라내고 덧대고 마모시키고 용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경계, 내부와 외부를 재설정하게 된다. 벌어지고 절단되는 동시에 부분적으로 복제되면서 기존의 지지체는 버려지고 새로운, 혹은 투명한 지지체에 자신을 기댄다. 이 오래된 사물들이 부여받은 사후의 삶은 그전과는 다른 맥락과 형식으로 ʻ지금 여기’의 ʻ사이-공간(in-between)’으로서 가변적인 지형을 재구축한다. 이처럼 홍유영의 작업에서 조각의 ʻ형상’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시성의 조건에 달려있으며 매번 변화무쌍한 그 무엇이다.


    전시장을 들어서며 정면으로 보이는 오브제는 옆으로 돌아볼 때 끝이 굽은 목재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벽이나 기둥에 붙은 금속 선재나 금속판은 배경과 미세한 차이를 만들면서 배경에서 슬며시 분기한다. 어쩌면 형상-배경의 경계가 순간순간 무화된다고 말할 수 있을 “비물질적 물성”1)이야말로 홍유영의 방법론이자 문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재료의 수준으로 강등된, 파편화된 사물들의 새로운 잠재성이 탄생하는 시간을 열어낸다. 나무 판재 끝에서 나무의 반지름 곡률을 흉내내며 다시 시작되는 유리판의 기예, 새로운 내부와 외부를 만들어내는 이질적인 나무, 유리, 스테인리스의 결속, 연역적이면서도 분기해 뻗어나가는 매듭과 차이의 운율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구조보다는 구조들 사이에서 기포처럼 터지는 저항과 변화의 시간에 주목하게 만든다. 그것은 사멸의 순간이면서 죽은 사물들에 숨을 불어넣은 부활의 순간이자 변종으로 재탄생하는 생성의 순간이다.


    작가가 과거 (2022)에서 제시했듯이 이러한 순간은 뒤집힌 가시성으로만 가능한 어떤 공간성을 열어낸다. 특히 홍유영의 유리 작업은 투명해서 체적이나 부피를 거의 갖지 않기에 공간을 거의 바꾸지 않는 동시에 전복시킨다. 보이지 않음과 존재함의 함수를 흔드는 그 변동은 지형학적이라기보다 위상학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과거 파손된 유리 자체를 재활용하던 방식에서 전환해 유리를 구부리고 세우는 최근 조형적 시도들은 더욱 허약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면서도 날카롭고 질긴 연장(延長)의 물성을 드러낸다. 이토록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취약한 구조가 주는 긴장감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텅 비어있다고 여기는 어떤 자리에서 항상 흐르는 어떤 것을 상기시킨다. 고대의 생기론(生氣論)자들이 ʻ에테르’라고 불렀을 보이지 않는 매체, 보이는 것들 사이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실체 또는 힘의 작동을 말이다.


    스테인레스 강판에 투명하고 미세한 유리 알갱이를 바른 (2024)는 비스듬히 바라볼 때 전혀 다른 강도의 빛을 내며 순간적인 추상을 만들어낸다. 이 고휘도 유리알들은 도로 표지용 도료에 사용되는 것으로, 재귀반사를 통해 야간에 운전자가 차선을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 재료다. 이런 물성을 조명하는 태도, 또 이것을 전면화하는 ʻ페인팅’은 우리 환경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매우 비가시적인 것들이 가시성의 실질적 지지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투명하게 환기시킨다. 유리알의 재귀반사뿐 아니라, 거미줄처럼 부유하는 스테인레스 튜브 구조나 구부러진 유리판들 또한 빛에 따라 형태가 드러났다 사라지는 가변적인 가시성을 극대화하면서 ʻ보이지 않는 것들의 두께’를 드러낸다. 이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가시성의 평범한 진리를 제시하지만, 무엇보다도 비어있다고 간주되는 공허가 의미 없음도, 무(無)도 아니라는 것을 속삭이듯 전달한다. 프랑스의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침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지만 결코 의미 없음이 아니다. 그는 침묵이란 말하기를 끊임없이 에워싸고 있는 배경이라고 했는데,2) 이 ʻ배경’은 뒤로 그저 물러선 것이 아니라 말을 에워싸는 힘이자, 말을 낳는(혹은 낳기를 거절하는) 말의 잠재태이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약속하지 않는 무수한 목소리들 사이로 배회하던 우리는 홍유영이 구축한 그 일시적인 말들의 파사드 앞에서 잠시 말을 멈춘다.

     



    1) 2024년 이길이구 갤러리에서 열린 홍유영 개인전의 제목.

    2) “우리는 발화되기 이전의 파롤과, 그것을 끊임없이 에워싸고 있는 침묵의 배경을 고찰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이 없으면 파롤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김화자 역, 책세상, 2020.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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