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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별도의 기획전: 반영하는 물질》 옥상팩토리 1.7~3.12글_이주연 / 옥상팩토리 어시스턴트 큐레이터작가이자 아트디렉터 장해미가 운영하는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 옥상팩토리는 작가 중심(기반)기획의 일환으로, 작가가 연구하는 재료 물질 매체 자체를 소개하고 전시를 통해 재료 ‧ 물질적 관계성에 주목하는 ‘별도의 기획전’을 진행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재료와 매체를 사용하고 시도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발생하는 시간적, 재료적 낭비를 줄이고 현실적인 재료 구매법, 사용법 등을 공유하여 효율적이고 전문적인 재료, 매체, 기술 탐구가 이뤄지길 바라며 시작되었다. 2021~2022년에는 재료 실험 자체에 집중하여 한 작가가 연구하고 있는 재료나 기법, 기술, 공학적 실험 등을 선보이고 공유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면 2023년에는 ‘상반기-물질’, ‘하반기-비물질’이라는 두 축으로 같은 재료 및 매체를 사용하는 작가들의 네트워킹을 통한 의미 확장의 장을 마련했다. 각 프로젝트 종료 후에는 결과자료집을 제작하여 해당 재료를 사용하고 있는, 사용하고자 하는 작가들 간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하고 기획자들에게는 재료의 물질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2023년의 ‘상반기-물질’의 키워드는 본인의 논문 「비근대주의 관점에서 살펴본 나움 가보의 예술적 전망 고찰」(이주연, 2021)에서 착안해 매체실험과 투명성을 바탕으로 ‘반영하는 물질’로 선정했다. 지난 석 달간 진행한 《별도의 기획전: 반영하는 물질》(이하 《반영하는 물질》) 은 회화, 조각, 설치, 키네틱, 인터랙티브 등 장르 제한 없이 ‘반영하는 물질’을 재료로 한 작품들로 예술작품과 주변의 상황, 현실을 지각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때 반영하는 물질은 거울, 아크릴, 렌즈, 투명하거나 반짝이는 물체와 같이 주변을 비추는 물리적인 재료 일체를 염두에 두었다. 실험전시는 오버랩/릴레이 형식으로 1~6부로 구성하여 10주 동안 6명의 작가와 13점의 작품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회차마다 물리적 ‧ 내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설치방식을 통해 각 작가가 사용하는 ‘반영하는 물질’이 여러 층위에서 서로 포개지고 반사하며 적극적인 침투가 발생했다. 변화하는 공간 구성에서 여섯 작가가 사용하는 물질(거울, 스마트폰, 프리즘, 크롬, 분광필름, 유리 등)의 속성과 효과를 살펴보았으며 모든 작품을 함께 감상하는 일은 전시의 마지막이자 세미나를 진행하는 3월 12일 하루였다. 참여작가 6인(강수빈, 김준수, 박재성, 심규승, 최은지, 홍유영)의 미발표 구작과 신작 위주로 각자의 주변 환경을 ‘반영하는 물질’로 제작한 개별 작품들이 도시, 인식, 가상과 실제, 현실, 감각 등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고 상호작용하여 물질의 성질을 극대화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회차마다 작가와 기획자 간에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작품 설치 단계에서도 각자의 영역보다는 전시 전체의 구성과 효과에 집중한 설치가 이뤄졌다. 1부의 시작인 심규승의 〈빛나는 구름〉(2023)은 유동적인 설치법으로 ‘분광필름’을 설치하는 위치와 방법에 따라 효과를 실험해가며 작업을 확장해가는 점이 기획 의도와 부합하여 1~6부 전체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2부부터 함께 한 강수빈의 〈반영의반영의(NULL)〉(2022~2023) 또한 6부까지 공간 곳곳을 돌아다니며 로봇청소기 위에 달린 거울과 이를 비추는 스마트폰 속 SNS화면을 통해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다른 작품들을 반영하고 비추며 다양한 장면을 연출하였다. 2부는 강수빈 〈부푼 벽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2022), 박재성 〈AH-o-HA〉(2022), 심규승 〈Light of the world〉(2023)와 장르적으로 구별되는 여섯 작품이, 3부는 강수빈, 김준수 〈Element of sense ver 1.1〉(2021), 심규승과 물성이 강조된 다섯 작품이 조우했다. 전시를 감상할 때 작품 하나의 내용과 의미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작품의 주변까지 감상의 폭으로 수용하여 자신만의 감상의 세계가 넓고 깊어지면 발견할 수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4부는 전시장 속에서 교차하는 강수빈, 김준수, 심규승, 최은지 〈Common Space_03〉(2020), 〈Re-Arcade drawing_03〉(2020)의 작품에 사용된 재료(거울, 프리즘, 분광필름, 유리)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작품에 사용된 재료(반영하는 물질)의 물질성과 상호작용성에 주목함과 동시에 다양한 상황의 순간이 ‘재료’에 함의되어 있음을 인정할 때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5부는 홍유영의 〈Negative Landscape〉(2023)가 전시공간 곳곳에 침습하여 반사와 굴절이 무한으로 반복되는 상황을 연출했다. 어쩌면 《반영하는 물질》에서 보는 것들은 경계면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여러 경계면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지금, 우리는 새로운 관계와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는 장을 만들었다. 1~5부는 여러 만남에 대해, 6부에서는 오고 간 시간의 겹 사이에서 남겨진 강수빈, 김준수, 심규승, 홍유영의 다섯 작품으로 전체와 분절, 투명함과 불투명함, 무색과 유색, 분산과 굴절 등의 재료적인 성질을 논하며 전시를 마무리했다.해당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재료연구세미나’는 3월 12일에 열려 예술현장 관계자들이 논의를 이어갔다. 본인은 불확실성과 미결정성이라는 실험전시의 마지막 자국을 남기며, 어떠한 방식으로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내비쳤다. 세미나에서 참여 작가 6인은 현실적으로 재료를 구입하고 다루는 방식과 본 프로젝트의 효과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본인은 ‘반영하는 물질’ 재료 자체의 반사성에 대한 논의에서 더 나아가 반영하는 물질이 관람하는 자신과 현실까지 도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장된 논의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2부에서는 권태현 비평가가 ‘반영하는 물질(재료탐구)과 실험전시(전시 형식)에 대한 의미’를 주제로 세미나를 이끌며 본인이 주목해왔던 투명한 물질에 대한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재료’ 중심적인 서사를 생성하는 전시의 의미를 돌아봤다. 이에 더해 유리와 플라스틱 등 현재 우리의 주거 환경을 이루고 있는 재료를 사용한 작품들과 과거 미술사에 남은 투명한 재료를 사용한 작품의 계보를 짚었다.타인의 작품과 물리적으로, 내용적으로 적극 침투하고 상호작용하는 전시설치 방식을 통해 이번 프로젝트이자 전시는 여러 층위에서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반영하는 물질’의 속성을 살펴보고, 작품 간의 관계성을 파악하여 지금 여기에서 일시적이면서 지속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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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살아간다는 것의 방법장진택 독립큐레이터홍유영의 작업은 시적이다. 그의 작업의 형상은 단순하거나, 명료하며, 간결한 상태로 완결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작위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그만의 일정한 문법에 따라 어떠한 운율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한 형식의 순수성은 그 외면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깊고 넓은 의미의 함축을 투영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관객의 상상력을 극단적으로 자극한다. 문학에서는 단순명료한 단어나 구, 절 등의 문장 성분들을 조합함으로써 시라는 작품을 완성하지만, 시각 예술의 범주 안에서는 재료나 그 물성에서부터 매체까지를 아우르는 오브제나 평면의 파편들 혹은 그 조합을 통해 작품이나 전시를 구성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작가의 작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방식이 문학에서 시의 그것과 닮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홍유영의 작업은 어떠한 이유로 인해 시적으로 되어야만 했을까. 그는 왜,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기에 이러한 방법론을 작품에 투영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홍유영의 작업을 공간이나 용적과 같은 물적 영역과 이와 동기화하는 체계와 사상의 영적 영역(여기서는 정신적 영역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 그리고 개인 또는 집단의 삶이라는 인적 영역의 세 가지 벡터로 크게 구분해 조망한다. 물적 영역은 시각 예술에서, 특히 조각의 영역에서 주요한 요인이자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 우선은 각각의 재료를 가공한 후, 이를 원하는 물리적 형상으로 조형하며, 각 부분이나 전체를 이루는 최초의 구성요소로 완성한다. 여기서 적정한 수준으로 완성된 일부는 그것이 다시 작품이라는 상위의 개념을 완성하기 위한 또 다른 세공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데, 그 과정은 여전히 물적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기도 하거나, 때로는 그 영역을 이탈하는 개념적인 의미 부여의 행위를 거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과정이 종료되고 나서야 비로소 작품은 제 의지를 내재한다. 그제야 그 작품은 완성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일정한 정도로 어딘가를 점유함’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작품과의 상호작용에 있어 ‘일정한 정도의 점유’라 함은 다시 이것이 ‘특정한 단계를 형성하고 있음’과 동일하게 간주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홍유영의 작업 구축하는 계층을 한층 더 얇은 것으로 이해하게 하면서, 그 막들을 켜켜이 올려 만들어내는 어떤 오브제를 좀 더 (반) 투명하게 보이도록 한다. 이는 물적 침범을 통해 감상의 영역과 감각의 영역 사이를 흐리고, 동시에 비가시적인 영적 영역과 일상에서의 실천을 동반하는 인적 영역 등의 상이한 영역들을 자신의 작업 세계 안에서 공존하게 하는 효과적인 연결고리로 기능을 하게 한다.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가 오브제라는 물적 영역을 (반) 투명하고 얇은 레이어로 치환하여 작업을 구축하는 것은 분명히 이 영적 영역의 벡터를 작품 속에서 공존케 하기 위함일 것이다. 작품의 표면과 내부를 구분 짓는 구성 방식은 보통의 미술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반적인 형태이지만, 홍유영의 경우에는 그 접착의 정도가 비교적 더 견고하고 더 단단하게 결합하여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작가가 실제 그 장소성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재료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일 때 더욱 부각하며, 기존의 공간적 특성을 은유하는 표현의 기법을 적용할 때 역시 유사한 인상을 발산한다. 구체적으로는 그가 실제 그 장소에서 발견하거나 사용한 물건들을 작품의 일부로 위치시키거나, 실제 그 장소의 상황이나 맥락을 반영하는 성질을 작품의 구현에 적용하면서 이 효과는 더욱 극대화한다. 바로 이때, 물적 영역에서의 감각함은 그 자체로 발산하는 외적 의미의 한계를 지나친다. 그리고선 곧바로 작품의 안과 밖이라는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며, 이로써 영적 영역을 물적 영역과 함께 단숨에 꿰뚫어 이어낸다. 말하자면, 홍유영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우리는 단순히 그 외양이나 내면 어느 한쪽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며, 그 사이의 상호 동반적 상태를 전제하고 그의 작품을 마주해야 한다.이렇듯 홍유영의 작품이 물적 영역과 영적 영역의 교차점 위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동안, 이를 창작하기 위한 작가의 삶과 이를 마주하며 회고하는 관람자의 삶은 작가 작업을 이루는 마지막 벡터로 자리한다. 지금까지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홍유영의 작업은 작업으로의 진입을 유인하는 오브제라는 물적 영역, 그리고 하나의 재료이자 소재로 역할 하는 이 오브제를 (또는 오브제와 오브제를) 엮어내면서 작업의 개념과 그 의미 시사를 도맡는 영적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는 작업 구축에서의 이 마지막 벡터를 이른바 인적 영역이라 명명하는데, 이는 두 영역의 앞단과 뒷간으로부터 이 전체의 영역을 관통하는 한편, 그 모든 가로지름의 출발과 종착을 도맡는다. 그의 작업에서 결국 모든 것은 삶으로 회귀한다. 삶은 나의 것을 지칭하기도 하고, 너의 것을 지칭하기도 하며, 우리네 그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먼저 내보임으로써 너와 우리의 삶을 상기한다. 작가의 작품은 곧 작가의 삶의 일부이거나, 적어도 우리 삶의 일부이다. 그 일부의 경험은 우연으로 일어났었거나,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자신에게 타인의,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돌이키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남아 있는 사실은 모든 것이 뒤섞인 상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끝으로, 나는 상기의 서술 방식으로 인해 혹여나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발생할 수 있는 오해나 몰이해의 여지를 지워내며 글을 맺고자 한다. 나의 비평은 홍유영 작업을 구성하는 요소를 세세히 뜯어 나열하고 있지만, 그것은 작업의 구성요소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뒤섞여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내가 홍유영의 작업을 위치시킨 교차의 지점, 즉 물적 영역과 영적 영역 그리고 인적 영역은 모두 다르지만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그 차이보다는 이 영역들 사이를 마찰시키고, 융합하며, 연결하는 작가의 방식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위의 여러 영역을 작가의 작품을 구축하는 벡터로 인식하는 동시에, 이 모든 구조의 처음과 끝에 삶이 있다는 나의 비평은 작가의 혹은 작가에 의한 작업의 방법론이 작가의 혹은 작가에 의한 삶의 방식과 같을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우리의 혹은 우리에 의한 삶의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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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리각미술관 관장 이상원홍유영의 작업 ‘건축술’은 안정적, 혹은 항구적이라는 의미에 대해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안정성과 항구성을 추구한다. 선사시대의 조상들이 안식을 도모하기 위해 신중하게 선택했을 동굴에서부터,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모듈화된 구조를 지닌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건축은 거주자의 입장에서 삶의 편의성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을 지닌다. 목적이 지나치게 부각되면 과정에서의 부작용과 희생은 별 것 아닌 일로 치부되기도 할 터. 작가의 ‘망치’로 조준하고 있는 ‘못’의 위치는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때 홍유영의 ‘건축술’이란 전시 타이틀은 대단히 도발적인 작명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작업을 ‘기억’이라는 단위로 구성되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도시공간이 탈바꿈하는 과정은 무차별적이며 맹목적이다.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영역이 바로 주거형태의 드라마틱한 변화다. 소위 ‘재개발’을 생각해 보자. 엄연히 우리 중 일부가 점유한 삶의 무대이기도 했던 ‘달동네’는 ‘수치스러운’ 항목으로 분류되고, 그 공간들을 난폭하게 밀어낸 자리에는 신축 아파트 단지가 ‘자랑스럽게’ 들어선다. 흔적으로라도 남아 있을 법한, 달동네가 품었던 기억의 ‘증거’들은 건축 폐기물과 함께 가차 없이 매몰되어 ‘인멸’된다. 거기엔 분명 ‘상처’가 남을 텐데, 우린 상처 받지 않는다. 수치스럽거나 자랑거리일 뿐, 상처 받지 않는다는 점이 기이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재건축’ 역시 유사한 작동 원리를 갖게 되므로, 과거를 간직하기 불가능한 파괴적 단절로 빚어지는 상처는 별반 다르지 않다. 홍유영은 우리가 상처 받지 않는 그 ‘상처’를 다룬다.작가 본인이 거주하던 70년대에 지어진 ‘반포’의 한 아파트 단지. 재건축을 위해 뜯겨 나가고 있는 이곳이 ‘공사현장’이다.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일상의 터전이었다는 특수성이 야기하는 버거움을 극복하고 물건의 ‘채집’과 공간의 ‘기록’이라는 ‘자재’(資材)를 활용하기 위해 ‘사유’(思惟)라는 정신의 ‘중장비’를 동원한다. 이를 통해 ‘장소성’의 다양한 맥락들을 건조하면서도 자유롭게 탐구해 간다. 껍질을 벗겨냈을 때 드러나는 속살처럼 건축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노출되는 모습은 평범한 상상을 넘어서는 형태로 보일 수 있다. 부서진 자재나 유리 파편, 콘크리트 덩이, 가구의 문짝, 용도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지는 도자기와 같은 일상의 사물들, 나무의 줄기나 등걸… 작가는 이처럼 폐기 단계의 건축 부산물들울 재구성하여 ‘정교한 무질서’의 상태로 전시하고 있다. 건축적 마감을 통해 성취한 최적의(optimal) 기능과 시스템은 해체의 과정을 거치면서 불안정한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것들은 우리가 외면하면서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상기하게 하는 유력한 단서들이다. 관객은 그 불안정한 모습을 관찰하며 자신이 지닌 모종의 상처들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다. 작가는 은폐하거나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시선으로 괴사한 피부조직처럼 상처 난 부위를 응시하고 있다. 이를 위한 작가의 건축적 상상력은 구축보다는 분열에 몰입하고 있다. 가구의 단면을 잘라 이면을 드러내고 그것을 기괴하게 조립하거나, 무겁고 거친 콘크리트 덩이를 우레탄이라는 가볍고 유연한 소재로 캐스팅하기도 한다. 또 이식(移植)을 위한 비용과 수고를 감수할 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잘려 나간 나무토막들을 틈을 두고 연결·배치하거나, 숙면을 위한 도구로 고안된 버려진 방충망을 모티브로 ‘INSOMNIA’(불면증)라는 모순적인 작품명의 작업을 조형적으로 설치하는 등의 기발한 방식으로 ‘시공’한다. 우연하게 ‘수집된 오브제’(collected object)는 역설적이게도 이 장소에 이 사물이 놓여야만 하는 필연성을 촉발시킨다. 이렇게 재구성된 사물과 공간은 초현실적 풍경이나 생경한 분위기의 극단을 펼쳐 보인다. 건축 현장처럼 보이는 전시장은 청각적 소음이 소거된 공간이지만, 그 곳엔 ‘시각적 파열음’이 진동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가볍고, 약하고, 가늘고, 위태롭다, 이런 상황들은 긴장의 에너지를 야기하고 나아가 증폭시키며 우리는 이를 감지하게 된다. 하여 조심스럽고 위축된 관람 태도를 갖게 된다. 이 불편한 전시 관람환경은 상처를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홍유영의 작업은 그런 식으로 우리가 소박하게 믿고 있는 자신의 기억과 ‘나’의 정체성에 대해, 가라앉고 있는 여진(餘震)처럼 미세한 균열을 조장하고,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와 같은 느슨한 전복을 선동한다. 우리의 ‘정체성’이나 이를 구성하는 단위라 할 수 있는 ‘기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튼실한 토대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예상보다 많은 천박한 자기위안과 합리화를 위한 거짓 믿음이 도사리고 있다. 꼭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정직하고 냉정한 자기성찰에는 인색하고 미숙하다. 특정 기억이나 사건에 대해 스스로를 자랑하거나 수치스러워할 뿐 상처받지 않는다(‘소셜 미디어’의 활용방식을 상기해 보라). 과거에서 파생한 내면의 상처는 은밀히 감추고, 현재 보여줄 수 있는 선택적 외양을 뽐내듯 과시할 뿐 상처받지 않는다. 우리가 나름 확고하다고 믿는 정체성의 실체는 이처럼 허구적 개념에 가깝다. 성숙하게 자신의 삶을 조망하는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나 지향에 대한 철저한 해체가 요구될지 모른다. 내가 안정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체계가 얼마나 허약하고 위험한 것인지에 대한 전폭적인 인정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재구축하기 위한 유의미한 ‘주춧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처 받는 일은 불가피하다.깨달음, 또는 진정한 앎을 위해서라면 상처를 지불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상처 받은 마음이 사유의 기본조건이다. 다음은 푸코의 언명. “안정된 삶이 사실은 사유의 적이다. 사유는 곧 다른 사유인데 순응과 안주의 상황 속에서는 누구나 다르게 사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근대 이후 ‘죽음’이란 단어는 일상에서 ‘금기어’가 되었다. 죽음과 상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위에 기술한 세태를 단지 일사불란한 죽음 위에 축조한 화려한 부활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상처 받을 수 없다. 상처 받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 없고, 깨달음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홍유영의 작업은 ‘상처의 기억술’이자 ‘치유의 건축술’이라 할 만 하다.건축물의 해체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로 엮어낸 우발적이고 불연속적인, 그래서 불친절한 내러티브구조로 ‘재건축’한 이번 전시장을 둘러보며, 우리는 돌연 허물어진 체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곤 넌지시 건네받는 질문 몇가지.당신은 상처 받을 수 있는가? 당신의 정체성은 온전한가? 그리고 당신의 삶은 여전히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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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Material and Structure in Urban Space2023홍유영“여기서 분석되는 것은 분명 결코 언설의 최종적인 상태들이 아니라, 최후의 체계적인 형태들이 가능하게 하는 체계들, 그에 관련해 최종적인 상태가 (체계의 출생 장소를 구성하는게 아니라) 그의 변이체들에 의해 정의되는 전최종적인 규칙성들인 것이다. 완성된 체계의 배후에서 형성들의 분석이 발견해 내는 것, 이것은 생기하는 생명 자체, 아직 포착되지 않은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체계성들의 거대한 두께, 복수적 관계들로 차있는 총체인 것이다.”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 (원사: 1969), p.115-116]인간은 공간을 만든다. 만들어진 공간은 본래 계획한 목적과 체계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기능하며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 어떤 공간이 공간으로서 공간성(spatiality)을 갖는다는 것은 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공간성이라는 것은 공간이 공간적 성질을 갖는 특수한 조건을 말한다. 공간적(spatial)이라는 것은 입체적(three-dimensional)이라는 것과 관계는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동일시되어 해석되기에는 생각보다 관계가 복잡하다. 이번 개인전 《Architectonics (건축술)》에서는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 있던 건축물이 차츰 해체되는 순간에 발견되는 공간을 형성하는 새로운 요소 또는 규칙성들을 발견하고 밖으로 끌어내면서 완결되지 않은 거대한 두께의 공간의 형태들을 감각의 층위로 올려 들여다본다.전시장을 들어서자 바로 보이는 큰 벽면에 설치된 (2022)은 서울의 한 철거 현장에서 수집한 여러 개의 실제 나무 몸통과 밑동 등을 일부분 조각하고 표면에 백색 우레탄을 올려 서로 떨어져 있지만 연결이 되는 듯 벽면 위에 길게 설치한 작업이다. 작가가 최근까지 거주했던 거주지가 재건축으로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그곳에서 50년 가까이 자란 나무들이 이식되는 나무와 폐기되는 나무로 분류되고 여기서 폐기되는 나무들을 계속해서 수집해 왔다. 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은 많은 경우 1970년 경 아파트가 건축되던 시기에 심어져 그 높이가 아파트보다 클 정도로 건축물과 세월을 함께하며 점차 공간적으로 지각된다. 수집된 나무들의 부분들을 오목하게 깎아 부드러운 면이 되도록 조각을 하여 나무의 원래 형태와 조각한 부분이 연결되는데 매끈하게 깎인 나무의 끝부분들은 각기 다른 나무의 형태가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간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방식으로 전시장 벽면에 배치된다. 백색 벽면에 설치된 백색 나무들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의 흐름에 의해 나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볼륨과 음영에 의존하여 그 형상을 드러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면서 일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공간적 흐름을 만들어 준다. 오랜 기간 특정장소에서 나무가 갖고 있었던 나무 각각의 고유한 특이성들이 만들어내는 사물의 표상(representation) 즉 그 유한성(finitude)들은 나무 표면이 전부 백색으로 탈색화(decolourization) 되면서 유한성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대상과 인간 그리고 공간 사이에서 확립되는 불안정한 외부적 관계가 개입되면서 새롭게 드러나는 형상에 집중하게 만든다.“아무리 단순한 것일지라도 질서를 확립하는 데에는 ‘요소들의 체계’가 필수 불가결하다. 가령 유사성과 차이가 나타날 수 있는 선분의 규정, 이 선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변이의 유형, 끝으로 위로는 차이가 있고 아래로는 유사성이 있게 되는 문턱이 절대로 필요하다. 질서는 사물들 사이에 사물들의 내적 법칙으로 주어지는 것이자, 사물들을 이를 테면 서로 바라보게 하는 은밀한 망이고, 이와 동시에 시선, 관심, 언어의 격자를 통해서만 존재할 뿐이며, 오직 이 격자의 빈칸들에서만 표명의 순간을 말없이 기다리면서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듯이 심층적으로 드러난다.” [미셀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원사: 1966), p.14]푸코는 (2012)의 서문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1942)의 텍스트 중 중국백과사전에 대한 글에 대해 여러 페이지를 통해 언급하며 인간이 만드는 지식 체계와 사유의 구조주의적 한계점을 주목하고 우리가 친숙했던 사유의 방식에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단순히 신화적인 동물이나 기괴한 동물의 등장으로 인한 알 수 없음 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의 마주침에 대한 것이 아닌 실재 존재하는 것과 상상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나란히 놓일 수 있는 그 질서의 기괴성 또는 기묘함에 주목한다. 또한 전혀 다른 존재물들을 서로 연결할 “공통의 바탕”이나 “사물들이 인접할 수 있는 장소의 부재”를 강조한다. 사물과 공간을 지각하고 의식하는 것은 어쩌면 푸코가 언급한 것과 같이 공통의 장소의 부재 속에서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을 찾아 열어놓는 행위로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은 사유가 부재하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선험 되고 필연적인 연쇄적 관계에 의해 사유되는 사유의 일관성에서 벗어난 지점을 말한다.이렇게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은 만들어진 공간들이 해체되는 찰나에 자리잡고 있던 모든 질서가 필연성을 지우고 병치될 수 없는 자리로 돌아갈 때 극대화 된다. 철거 중인 한 건물의 계단을 올라 계단 끝의 열린 문을 통해 바라본 실내의 풍경은 그 공간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오전을 지나 정오에 가까워 오던 시간,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서 내리는 강한 햇빛을 받아 공간 안의 널브러진 각기 다른 모양의 유리 파편들과 거울조각들은 마치 일렁이는 푸른 바닷물결이 햇빛에 부딪혀 반짝이는 것 마냥 바닥에 흩어져 들어오는 모든 빛을 흡수한 듯 한없이 반짝이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022) “각이 진 유리”와 미술관 미디어 룸에 설치된 (2023)라는 제목의 거울 작업에서는 실제와 상상의 간극에서 드러내는 물질의 새로운 질서와 형상을 그려내 본다. 재건축 현장을 관찰하다 보면 폐기하는 유리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현장 곳곳에서 수집한 다양한 형태의 투명한 유리들을 전부 작은 조각 형태로 잘게 부수고 모아서 네 면의 모퉁이를 지닌 형태를 만들고 중앙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높이가 올라가는 새로운 공간 구조의 각이 진 유리가 만들어 지기도 하고 각기 다른 형태로 잘게 부순 거울들을 빛의 반사를 통해 물질적 공간의 확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공간이 갖고 있던 질서를 벗어나 해체되는 순간 마주하는 물질의 형상은 간혹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던 것에서 벗어나면서 많이 다르기도 하다.재건축 과정에서 공간은 한번에 철거되는 것이 아니라 단계에 따라 공간이 차츰 해체되어 간다. 내부 인테리어를 철거하는 단계에서는 건축물 메인 구조에 붙어있었던 다양한 종류의 공간들이 떨어져 나가 건물 외부에 마치 벗겨놓은 공간의 껍질처럼 힘없이 쌓여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2022)는 철거 중인 한 공간에서 발견한 수납장 문들을 가져와 기하학적 형태로 절단하여 다양하게 잘려진 부분들을 연장시켜 전시 공간에도 일부 설치하면서 열린 입체적인 공간 구조로 확장 시킨다. (2022)와 (2022) 그리고 (2022)에서는 수집한 오브제나 나무들이 기존의 형태와 질서에서 벗어나 특정한 방식과 질서로 공간이 확장된 형태를 발견 할 수 있다. 사물이나 공간이 어떤 덩어리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마치 그 덩어리에 얇게 붙어있었던 껍질을 벗겨 놓은 것처럼 힘없이 쌓여있는 사물이나 공간 상태는 물질이 만들어진 상태 중 가장 연약해진 상태로 보여진다. 이렇게 연약해진 상태의 물질을 이리 저리 건드리다 보면 쉽게 늘어나는 (물질적 또는 개념적) 지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사물들 사이의 질서나 사물의 내재적 규칙성 또는 공간성을 확립하는 것은 존재물의 불연속적인 지점을 찾는 것과 분명 연관이 있다. 공통성을 상실한 이 불연속적인 지점은 푸코가 말하는 “분류상의 왜곡” 또는 “균질한 공간이 없는 도표”를 만드는데 상당히 적합한 공간적 조건이 된다.전시장 중앙에 놓인 길이 6미터의 거대한 플랫폼 위에 설치된 (2023)는 “잃어버린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으로 묘사된 “불면증”이라는 보르헤스의 단어를 떠올리며 도시공간의 생산과 소멸의 간극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질서를 시공간적으로 재해석한 설치 작업들의 연작이다. 좁은 간격으로 절단한 얇은 스텐레스 판재를 길게 전시장 천정에서부터 설치하여 스텐레스 라인 하나하나가 공중에서 움직이듯 내려오면서 보일 듯 말 듯한 공간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 공간구조는 눈으로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가늘지만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순간 드러나게 되는 좌대 위의 얇은 스텐레스 와이어로 확장되면서 철거현장에서 수집한 여러 오브제들 사이를 지나며 연결된다. 이렇게 얇고 가는 시각적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공간은 시각적인 것과 비시각적인 것의 경계의 끝부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몸에 있는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게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내기도 하고 서서히 사라지며 불연속적인 지점을 지속적으로 만든다.사물과 공간의 지각과 사유는 대상의 최종적인 상태나 최후의 형태를 구축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이렇게 사물과 공간이 최종적인 상태나 최후의 형태를 벗어난 상태에서 존재한다면 이러한 사물과 공간들을 사유가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주목해 본다. 사물과 공간은 일련의 내재적 또는 외재적 질서의 관계를 통해서 그 사물성과 공간성이 변화하고 드러난다. 이러한 질서는 푸코가 언급한 “세력 관계의 영역에서 전술적 요소 또는 연합(tactical element or blocks operating in the field of force relations)”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불균질적이며 다공성 구조 체계를 통해서 불안정한 작동을 하며 “한결 같지도 항구적이지도 않은 일련의 불연속적 선분” 위에 대상의 배치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질서를 통해 사물과 공간은 확장되거나 감소하고 느슨하거나 긴장하고 노출되거나 사라지게 되면서 요소들의 체계를 기획하는데 이것이 사물과 공간을 구축하는 또는 사유를 변환하게 하는 건축술(Architectonics)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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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홍유영“어의 순서나 존재를 합리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언어적인 것이며 가설적으로는 이미 ‘도서관’의 어느 곳엔가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 그 단어는 신성한 ‘도서관’이 예견하지 못했고, 그들의 비밀 언어 중 그 어떤 것에도 무시무시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11(원사: 1944), p.107]공간은 많은 경우 만들어진 상태로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우리가 직접 들어가 볼 수 없는 공간들은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특히 (타인의) 주거공간의 경우 내부를 볼 수 있는 경우가 극히 한정적인 경우가 많고 도시공간에서 열려있는 공간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많지 않다. 빽빽하게 들어선 수많은 공간들을 지나치면서 비슷한 외장으로 뒤덮인 건축물들은 우리 시야에서 쉽게 빠르게 사라지곤 한다. 이번 개인전 《dhcmrlchtdj》에서는 재건축 과정에서 해체되는 찰나에 발견되는 공간들의 다양하고 새로운 면들을 좀 더 들여다보며 집중해 본다.50년 가까이 긴 세월을 담고있는 66개의 아파트 건물로 이루어진 큰 단지 안을 가로질러 발걸음을 멈춘 곳은 그곳에 사는 동안 가까이서 오랫동안 관찰해본 적이 없었던 한 아파트 건물이다. 바로 앞 동은 건물의 일부를 부수고 있었고 요란한 현장의 굉음과 온몸을 뒤흔들며 울리는 진동 한가운데 올라선 계단 끝에는 형형색색의 다른 공간들이 각층마다 펼쳐지고 있다. (2022)은 작가가 살던 단지 안의 다른 거주자들의 공간을 촬영한 사진작업들이다. 오전을 지나며 정오에 가까워 오던 시간, 구름 한점 없던 하늘에서 내리는 강한 햇빛을 받아 공간 안의 널브러진 각기 다른 모양의 유리 파편들과 거울조각들은 마치 오래 갖고 있던 귀금속 상자를 떨어뜨린 것 마냥 바닥에서 모래알같이 흩어져 들어오는 모든 빛을 흡수한 듯 한없이 반짝이며 공간을 채운다. 철거가 진행 중이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붙박이 가구 부분들과 예전의 색들을 머금고 있는 다양한 색감의 벽지들은 외부의 삭막한 공사현장의 상황과 대조가 되면서 그 색들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강하게 발산된다. 내부 공간에 들어서자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르고 주위의 소음이 점차 잔잔해지면서 각각의 공간이 온 힘을 다해 내뿜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한때 거주자들이 살고있을 때는 낯선 이들의 공간을 들어갈 수 없어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여러 실체 없는 공간들이 마침내 해체가 되는 찰나에 그 닫혀있던 비밀의 문들이 모두 활짝 열리면서 눈 앞에 펼쳐진다.전시 공간을 들어가자 바로 보이는 큰 벽면에 길게 설치된 (2022)은 10개의 흑백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작가가 실제로 살던 집이 석면 철거를 위해 백색의 비닐 소재 보양재로 공간을 한치도 빠짐없이 전부 싸는 순간을 담은 작업이다. 흰색으로 온통 덮인 내부공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벽을 감싸며 공간 전체를 휘감으면서 무한대로 확장이 된다. 철거된 큰 거실 창문을 통해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은 창 앞을 바로 가로막고있는 흰색 보양재에 빛이 투과되면서 마치 거대한 조명을 켜놓은 듯 실내를 밝혀주고 비닐 특유의 재료적 특성으로 보양재 표면의 반짝임은 시각을 따라다니며 계속해서 움직인다. 급격하게 변하는 도시공간을 마주하게 되면서 언뜻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1944)에서 육각형의 구조로 무한(unlimited) 하지만 주기적(periodic) 질서를 갖고있는 바벨의 도서관(The Library of Babel)을 떠올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공간을 서술하는 텍스트들에 관심이 많은데 특히 이 도서관은 특정시기에 인간이 만들어놓은 공간 이라기 보다는 태곳적부터 존재해오던 공간으로 묘사되어 그 실체에 대해 우리는 전부 알 수 없는 특징이 눈길을 끈다. 도서관의 건축적 구조는 육각형으로 되어있는 벽면 중 네 면에 각각 다섯 개의 책장이 채워져 있고 이러한 진열실은 다른 진열실과 열려있는 구조로 무한대로 연결이 되어 펼쳐진다. 오랜 기간 살았던 공간이 해체되는 순간 목격되는 공간의 다양한 모습들은 마치 바벨의 도서관이 무한 하지만 주기적인 질서로 존재하는 모습과 사뭇 중첩된다. 다른 쪽 벽면에 설치된 (2022)는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모든 철거 과정은 건축물을 철거하기 전 주변의 나무와 식물 그리고 정원과 놀이터들이 먼저 철거, 폐기 또는 이식된다.) 한 때 오래된 아파트 정원의 한 모퉁이를 50년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던 큰 돌을 전시장으로 가져와 설치한 작업이다. 종잇장같이 얇고 긴 직사각 형태의 스텐레스 판재가 큰 돌 아래 바닥을 지나 전시장 한쪽 코너와 맞닿으면서 방향을 틀어 벽면을 타고 올라가면서 선적 구조가 전시장의 벽면으로 이어지도록 설치한 작업이다. 바위나 돌들은 주거환경을 시각적으로 장식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어 왔던 재료들이며 이들은 도로와 정원을 구분하는 등 공간적 지표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공간적 지표를 수행하던 돌은 옮겨진 다른 공간에서 그간 잊고 있었던 그것이 본래 갖고있는 물리적 무게감에 집중하면서 또다른 공간 질서를 만들어낸다. 인성(touchness)은 금속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파손되거나 충격에 잘 견디는 성질, 즉 휘거나 또는 구부렸을 때 금속이 그 힘을 버티는 저항의 정도를 이야기 한다. 이러한 인성이 큰 스텐레스 판재를 좁게 절단하여 구부리고 그 구부림의 정도가 최대치에 달하는 지점에 구조를 고정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공간을 확장시킨다. 사물과 재료 등 대상이 갖고 있는 내재적 특성을 외부로 끌어내어 재료의 힘과 움직임 또는 그 저항하는 (물질적 또는 비물질적) 힘이 최대치인 지점을 찾는 과정은 곧 그 물질의 내부에 내재된 다양한 시간들을 우연한 찰나에 발견하게 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재료를 계획에 맞게 미리 재단하여 목적에 맞게 구축하는 일반적인 건축 방식과는 아주 다르다. 유연한 건축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유연한 건축법(Flexible architecture)은 그 형태, 구조,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상호적 관계가 중요하다. 이러한 상호적 관계는 우연성과 즉흥성에 기반하지만 우연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즉 기존의 대상이 갖고있는 질서나 규칙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이해 되기도 하는데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사고 과정 속에서 그 움직임과 구조를 예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도출되는 지점에 대상을 포착하여 파악하고 변화시켜 구체적인 형상과 관계를 새롭게 결정하며 만들어 준다. 호르헤스가 서술한 바벨의 도서관은 세상의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 동일한 책은 한권도 없지만 수십만 권의 불완전한 복사본이 존재하며 책 커버에 박힌 글씨는 책 내용을 지시하거나 예시하지 않고 책의 내용 또한 태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어떤 언어에도 속하지 않아 불가해하다. 수많은 책들 중 한권에는 내용도 없고 장황하게 길게 늘어놓은 글이 있다. 글자의 조합이나 의미 또는 발음까지 불가능한 글자들의 집합체가 도서관 안의 책들 중 한권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마치 도서관이 예견하지 못한 의미 없고 조합이 불가능해보이는 글자들의 존재처럼 사물이나 공간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확신은 “우리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거나 환영적인(phantasmal) 존재”로 만드는 듯 보인다. 반복적 변화가 일어나는 일상 속에서 그 중 (물질적 또는 비물질적) 해체가 되는 과정 속에서 공간이나 사물들을 좀 더 들어가 보면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발견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있던 특정 단어나 개념으로 명명할 수 없는 순간이나 공간 또는 대상이 분명 존재하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의식과 감각을 정해진 질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만들어 가게 된다. 이러한 지점을 찾아가는 탐구는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된 (2022)에서도 보여진다. 이번 전시 공간은 을지로의 오래된 건축물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전시장의 전면에 자리한 큰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의 움직임이 인상적인데 이러한 전시공간이 갖고있는 특수한 장소적 특성들을 이끌어내어 작품에 연장시켜 본다. 오랜 기간 거주했던 아파트 단지에 나무들은 많은 경우 1970년 경 아파트가 건축되던 시기에 심어져 그 높이가 아파트보다 클 정도로 건축물과 세월을 함께하며 점차 공간적으로 지각된다. 철거 과정에서 수집된 폐기된 오래된 나무 밑동과 몸통들은 실버 크롬으로 도색이 되어 거울 또는 금속의 성질을 드러낸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나무의 표면들은 공간적으로 지각되는데 주변 공간을 끌어 담으며 표면 굴곡에 따라 공간을 변형하며 반영한다. 전시장 중앙에 매달린 여러 개의 스텐레스 메쉬들은 눌리는 힘과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곡선의 움직임과 공간의 깊이 및 형태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연한 금속 라인은 금속 자체가 갖고있는 단단한 재료적 성질을 뛰어넘어 상당히 유연한 형상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반짝임을 덧입고 얇은 스텐 와이어와 체인에 연결되어 거울 같은 나무 조각들로 공간이 확장된다. 움직이는 시각에 따라 드러남과 사라짐이 불분명하게 반복되는 구조는 우리의 감각과 의식을 긴장감과 유연함 사이를 오가며 지속적으로 확장시키며 그간 명명되지 않았던 그 “어떤 공간”과 마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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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홍유영“아주머니의 방이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떠올린 것은 단지 그 잘린 벽면이었다.)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2(원사: 1913), p.91]프랑스 작가인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1913)에서 나레이터는 어머니가 준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프티트 마들렌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여러 번에 걸쳐 먹으면서 그 맛과 향기에 과거의 콩브레에서의 기억들을 차츰 떠올리게 된다. 감각과 사고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그 대상이 갖고있는 흐릿한 실체를 끄집어내려 한동안 몸부림을 친다. 마치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 찾아가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라져 가는 감각을 붙잡으며 그것이 의식의 표면에 이를 때까지 어둡고 불분명한 긴 알 수 없는 상태를 계속해서 지나가면서 텍스트에서의 시간은 순간 과거의 한 시점으로 흘러가서 레오니 아주머니가 살던 방을 지나 마을의 모습 그리고 콩브레 근방의 곳곳이 펼쳐진다. 프루스트는 서술에 있어서 짧은 시간을 아주 길게 늘이기도 하고 긴 시간을 짧게 넘어가기도 한다. 오래전 과거 시점과 현재의 시점의 서술에 있어서 그 시간의 길이가 다르다. 또한 사건이 지속되는 시간의 길이와 그 길이를 통해서 사건 또는 대상의 드러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특히 스토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내용들 보다 서술자의 관점이 부각되면서 서술자의 관점이 투영된 사물과 인물 그리고 사건의 이야기가 확대되거나 요약 또는 생략 되면서 텍스트 안에서 다양한 층위로 드러난다. 지속되는 시간의 길이도 다르지만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오브제를 통해서 서술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적 순서를 뒤바꾸기도 한다. 즉 어느 순간 갑자기 소환되는 여러 인물들과 프랑스 콩브레 지역과 근방, 마을과 건축물과 정원 등의 특정 장소들과 다양한 사물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기억의 파편들이 표면으로 올라와 확장되고 늘어나고 변형된다. 텍스트에 나타나는 시간성은 이러한 변화에 개입한다. 이것은 통시적(diachronic)이며 일련의 역사적(historic) 흐름 안에서의 시간성 이라기 보다는 분열적이지만 순환적 특성을 띄고 있다. 스토리 안에서 일어나는 연속적인 사건들은 분열적인 시간성 안에서 대립되고 반복되고 순환되는 여러가지의 관계들을 만들어 낸다. 스페이스몸 미술관의 《Anachrony》에서는 점차 보이지 않고 점차 사라져가는 주거 공간을 중심으로 감각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 올라가 마침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는 또다른 이야기들을 펼쳐본다. 작가가 태어나고 최근까지 살던 주거지 이자 현재는 재건축으로 철거가 진행 중인 서초구 반포동의 50년 가까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 철거가 시작되기 전부터 오가며 수집한 폐기된 사물 또는 건축물 파편들을 연속적 상태로 끌어내 끊임없이 변형하는 또다른 실존적 형상을 만들어낸다. 한때 어느 누구의 삶과 함께 지속되었고 다양한 시간이 축적된 사물들과 공간들의 사라져가는 찰나를 붙잡아 그 시간의 틈새를 길게 늘여 본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한쪽 벽면을 따라 길게 설치된 (2022)은 현재 철거가 진행중인 서울 반포의 한 아파트 철거 현장에서 수집한 건축공간의 파편들을 재구축한 작업이다. 건축물의 파편들을 수집할 당시 현장은 건물을 부수는 단계는 아니고 실내 주거공간의 인테리어들을 철거하는 단계라서 아파트 건물 외부에는 건축물의 벗겨진 내부 공간들이 힘없이 널브러져 산처럼 쌓여있었다. 이 작업은 한때 오래된 아파트 실내 공간에서 다른 공간 구조를 이루고 있었던 건축 공간의 부분들을 옮겨와 다른 질서로 연결시키면서 연속적으로 늘어놓는다. 이 껍질 같은 공간의 표면을 모아서 수직이 아닌 수평적으로 재구축하고 이를 또다시 전시장 벽면 위에 수평적으로 설치하여 전시장 벽면 공간을 연장시킨다. 이렇게 늘어난 공간들은 프루스트가 (1913)에서 레오니 아주머니와 프랑수아즈가 수다를 떠는 사이 부모님과 함께 들른 콩브레 성당의 아름다움을 무려 열다섯 페이지로 묘사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된다. 한 장소나 사물 등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특정 대상에 대한 장면들은 기억 속에 저장되는데 이러한 기억들과 생각들은 머릿속에 보관될 때 있는 그대로 보관되기 보다 변형된다. 그리고 그것을 현재 시점에 찾아서 다시 꺼내어 볼 때 또 한번의 변형 과정을 거치며 재생산 된다. 프루스트는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이 주변의 사물이나 자연 또는 공간에 갇혀 있고 “그 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고 말한다. 어쩌면 대상의 존재를 인식하는 인간의 사고, 지각과 감각하는 것이 대상의 비물질적 영역을 만드는 하나의 마법 같은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 비물질적 영역은 대상을 지각 또는 감각한 시간과 그것을 사유 또는 상상하는 시간의 간극 사이에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대상을 사유하는 물리적인 시간의 길이와 그 깊이가 반드시 상대적이지는 않겠으나 이 둘 사이에 어떠한 정해진 절대적인 법칙도 없다. 다른 말로 대상의 비물질적 형태는 사유하는 방식에 따라서 계속 변화하고 이는 다시 물질 위에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색의 껍질이 층위를 이루며 켜켜이 덮이게 한다.“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2(원사: 1913), p.86]낮은 높이의 커다란 플랫폼 위에 만들어진 (2022)은 재건축 현장에서 수집한 다양한 오브제들과 이를 공간적 지표로 삼은 복잡한 선적 공간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의 한 공간의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물들은 현재 시점에 소환되어 전시된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을 만들며 새로운 서사를 만든다. 하루 종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그 시간을 타고 함께 움직이는 의식의 흐름 안에 있다 보면 지각하는 대상의 실체와 깊이를 가늠하고자 하는 갈증을 느끼게 된다. 지나온 횡적인 시간과 그 횡적인 시간을 이루는 수많은 시간들의 찰나들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종적으로 확장시키는 지에 따라 그 대상의 보이지 않는 영역이 결정된다. 프루스트는 텍스트에서 불면증의 시간이 “잃어버린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으로 묘사한다. 장소나 공간 또는 사물은 만들어지는데 그 만들어지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대상 자체에 있는 특성을 얼마나 늘어뜨릴 수 있는지 어떻게 늘어뜨리는 지에 따라 대상의 지각의 범위와 그 구체적인 형상이 결정된다. 불면증은 이러한 생산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의 틈새 또는 파열하는 지점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사이의 공백의 시공간을 오가며 대상을 만들고 확장시킬 수 있는 불균질적인 시간적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 문학 이론가인 제라르 주네트(Gerard Genette)의 (1973)에서는 이러한 분열적 특성의 시간성을 아나크로니(Anachrony)라고 규명한다. 소설에서 스토리를 시간적 관점에서 볼 때 이야기는 사건들이 연대순(chronological)으로 정리되지만, 서술(narrative)에서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다. 아나크로니는 서술자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특정 시간적 질서를 말하는데 이는 서술자에 의해 다르게 조정되고 배치된 시간을 이야기 한다. 즉 아나크로니는 연대기적 시간 질서를 벗어난 스토리와 플롯 사이의 존재하는 시간적 불규칙성을 말한다. 이를 통해 장소 또는 사물 등 대상을 사유하는 방식과 유사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시간적 불규칙성은 전시장 한쪽 벽면과 한가운데 놓여진 같은 타이틀의 작업인 (2022)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벽면에 설치된 네 개의 사각 스텐레스 구조는 두 면이 각기 다른 길이로 잘린 형태로 그 경계 안쪽으로는 잘려진 녹색 유리 파편들이 다양한 형태와 층위로 채워져 있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과 다른 기억들이 축적된 각기 다른 유리 파편들은 빛에 반응하며 공간에 연속된 그림자를 만든다. 바닥에 설치된 같은 제목의 다른 작업은 스텐레스 베이스의 가느다랗게 길게 파인 홈 안에 다양한 모양의 수집된 여러 장의 유리 파편들이 수직으로 꽂혀 있는데 각각의 투명한 유리판의 불규칙적으로 깨어진 라인들이 겹겹이 쌓이면서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공간구조와 움직임을 드러낸다. 한데 모인 유리판들은 어떤 각도에서는 완전히 겹치게 되어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지기도 하는데 이렇게 움직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시공간적 불규칙성은 순간적으로 만들어지는 포착의 시간에 대상의 형상을 늘이거나 줄이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