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하고 가는 것들을 일으켜 세우기 - 안소연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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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영: The Hydrology Project]
2023.8.4-10.22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안소연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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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영의 《The Hydrology Project》(2023)는 말 그대로 ‘수문학(Hydrology)’을 참조한 조형적 관계를 가늠하게 한다. 회색 콘크리트와 철제 패널이 노출된 전시 공간의 벽과 바닥과 천장은 화이트큐브의 중립성을 강요하는 대신 공간 전체의 물성을 강조한다. 차갑고 건조하면서도 그 표면 안에 열을 발생시키면서 물을 응축하고 있는, 이를테면 공간의 원초적인 물성 같은 것을 문득문득 환기시킨다. 산업적인 건축 자재의 노출은, 그것의 인공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어떤 기원과 소멸까지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공간의 특징은 홍유영의 《The Hydrology Project》의 범주를 물리적 한계 너머로 이끌면서 공허와 흑암에 둘러싸인 태초의 시공간처럼 추상적인 임의성을 지속적으로 나타낸다. 물질의 원소들이 하나의 존재처럼 받아들여질 그러한 상상의 시공간을 암묵적으로 이끄는 셈이다.
이 《The Hydrology Project》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적인 작업은 (2023)와 (2023), 그리고 전시 제목과 동명의 기계 장치 (2023)가 있다. 투명한 유리와 은색의 가는 금속 선재, 간혹 어떤 오브제들이 위장하듯 표면을 변형시킨 채 회색 공간 속에 배열되어 있다. 허약하고 흐릿한 물성의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이 개별적인 작업들은, 공간 속에서 낮게 서 있거나 매달려 있거나 서로 지탱하며 반쯤 일으켜 세워진 상태로 시지각적인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방어와 보호를 동시에 드러내면서, 해체와 구축을 반복하듯, 긴장과 균형을 오가는 감각의 미세한 전이가 신체에 파고드는 것 같아, 시선과 몸의 움직임은 신중할 정도로 느리게 작동하게 된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보겠다는 강박적인 감각의 충동과 더불어 볼 수 없는 것들이 예외적으로 출현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뒤엉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바로 이 현재의 순간에 대한 경험을 한없이 증폭시켜 놓을 요량인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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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건축 혹은 장소의 해체에 관심을 갖고 거기서 발견한 사물이나 건축 자재의 파편들을 작업의 재료로 가져와 사용했던 홍유영은. 이를 가지고 특유의 조형적 재구성의 감각을 드러내는 형태 및 물성 탐구의 면면을 이어왔다. 아마도 폐유리는 그가 꽤 오래 사용한 재료 중 하나일 텐데, 최근까지도 진행 중인 ‘Negative Landscape’ 연작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대략 2017년 바퀴 달린 나무 판 위에 조각 난 유리 판의 파편을 켜켜이 중첩시켜 고무줄로 고정시켜 놓은 로 연결된다. 최근에는 크고 작은 유리 판 조각을 최소한의 부속을 이용해 입체적인 구조물로 재구성하여 공간 속에 세워 놓는 방식의 ‘Negative Landscape’ 연작을 볼 수 있다. 건축 철거 현장에서 발생하는 유리 잔해물을 이용한 일련의 작업에서, 그는 건축적 프레임을 지지체 삼아 공간을 구분하고 축소하고 확장하는 유리의 유연한 기능뿐만 아니라, 투명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흐릿하고 날카로운 위상 변화를 잠재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유리의 질료적 특징을 활용해 조형적 탐구를 수행해 왔던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는 “물의 순환”이라는 비가시적인 물질의 이동성과 위상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만큼, 전시 공간 전체에서는 이 물질의 순환 과정을 은유적으로 접근한 작가 특유의 사유와 감각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이 추상이라 할지라도) 조각이 태생적으로 함의하는 인간 형상에 참조는 홍유영의 몇몇 구축물에서도 느껴진다. 무언가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동작처럼 어떤 의인화된 안무가 특정 오브제들의 구성과 배열에서 간간이 목격되고, 어떤 것은 무대 위의 소품처럼 그 이상의 어떤 형태에 대한 상상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우리의 신체 보다 한 걸음 앞서 안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리 조각들은 매끈한 금속 오브제들과 결합해 물리적인 힘의 균형 상태를 유지한 채 바닥에 서 있다. 선재와 판재의 조건 상 홀로 직립할 수 없는 이 허약한 존재들은 서로의 결합과 힘의 안배를 통해 바닥에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만한 당위를 얻게 됐다. 마치 밤새 내린 비가 움푹 파인 웅덩이에 고여 그 응축된 형태를 땅에 흔적처럼 남긴 채 서서히 허공으로 일으켜 세워져 비가시적인 물질로 허공이라는 공백을 채우게 되는, 이 투명한 물질의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수수께끼 같은 동사적 변형에 관해 환기시키면서 말이다.
를 사이에 두고 매달려 있는 두 개의 조각적 형태는 언뜻 “물의 순환”이라는 서사에 엮여 구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름이었다가 눈이 될 수도 있고 비가 될 수도 있고, 그 무엇이든 상관 없지만 허공을 사이에 둔 지표면 위 아래의 물의 형상과 대구를 이루는 그림자 같기도 하고 반사된 이미지 같기도 하다. 사실, 홍유영의 연작을 구성해 온 가늘고 허약한 물성의 선재 구축물은 유리 파편들처럼 일종의 잔해물로서 금속 판재로부터 떨어져 나온 네거티브의 정체성을 갖는다. 예컨대, 나선형 구조로 돌돌 말린 금속 선재의 모양은 금속 판을 깎을 때 떨어져 나온 파편에서 가져온 것이며, 쉽게 구부러질 것처럼 가늘고 긴 금속 선재는 판에서 잘려져 나온 나머지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는 근본적으로 어떤 형태와 물질 안팎에서 생존한 추상적인 잔해로서, 비가시적 체계 안에 있던 것들을 가시성의 영역에 (재)위치시킴으로써 그 둘 사이를 왕복하는 시지각적 경험과 상상을 이끄는 셈이 된다.
조각가들에게 네거티브에 대한 인식은 모국어처럼 체험적으로 축적된다. 홍유영은 보이지 않는 범주에 대한 조각적 관심을 확장해 오는 가운데, 임의의 전체에서 파생된 파편적인 부분을 네거티브로 지각한다. 그는 불확실한 대상에 대한 시각적 체험을 넘어서서 임의의 물성과 형태로 재구축된 실체를 공간 속에 “일으켜 세우는” 조각적 시도를 감행한다. 게다가 힘의 이동처럼 일련의 움직임을 함의하고 있는 투명하고 흐릿한 형태들은, 질료의 변형과 신체적 위상의 전환을 매우 섬세하게 조율해내는 감각의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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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해 가늘고 투명한 오브제들로 공백에 가까운 공간의 구조와 리듬을 되살려 놓은 ‘Negative Landscape’ 연작의 또 다른 장면을 보자. 홍유영은 전시 공간 가장 안쪽에 흰 색 가벽을 세워 임의의 벽과 바닥 면이 만나는 텅 빈 모서리를 설계했다. 이는 어둠에 파묻히듯 금새 시각적 범주에서 소외될 만큼 투명하고 가는 형태들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됐다. 이 공간은 매우 가늘고 투명하고 흐릿한 사물들이 각자의 힘과 형태의 네트워크를 통해 공간 속에 일으켜 세워지는 삼차원의 마술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형태가 각각의 질료들 가운데 주고 받은 물리적인 관계 안에서 물성의 변화와 현존의 위상을 뒤바꿔 놓을 만큼 급진적인 전환을 겪으면서 우리 앞에 실존하는 무엇으로 서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호숫가 주변에서 파내듯 발견해 온 돌멩이와 끈 같은 오브제들은 이미 풍화와 퇴적 등의 물리적 변형의 시간을 땅 속에서 보내오면서, 우리가 알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표면을 제 스스로 만들어냈다. 홍유영은 그것을 흰 색 벽과 바닥이 구축하고 있는 삼차원의 공간에 가져다가 그 미세한 명암 속에 일으켜 세우듯 형태의 자리를 매만졌다.
이는 이미 지난 세기의 많은 조각가들이 조각적 가능성을 재창안해 내기 위해 실험했던 수많은 경험과 통찰의 연장선에 있다. 리처드 세라가 무용수들의 안무 동작을 참조하여 육중한 철판을 서로 기대어 바닥 위에 일으켜 세웠던 것처럼, 에바 헤세가 부드러운 라텍스를 캐스팅 기법으로 속을 비워내 공간 속에 세우거나 실과 종이, 섬유 등의 질료를 천장과 벽에 매달아 일련의 삼차원적 양감을 확보하게 했던 것처럼, 홍유영은 불가능한 형태를 삼차원의 공간에 현존하게 하기 위한 조각적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그는 비가시적인 물질이나 해체와 파괴의 재난을 겪은 질료의 변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러한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물질의 형태가 어떤 조각적 공간을 구축해낼 수 있을까 하는 감각의 전환을 섬세하게 잘 다룬다.
한편, 'The Hydrology Project'는 그가 비가시성과 가시성을 오가며 물질과 형태의 변환에 대해 탐구해 온 조각적 절차들을 재차 환기시킨다. 실제 공간의 공기를 채집해 장치 안에 모은 후 그것을 물로 변환시켜 일련의 증류 과정을 거치게 하는 이 장치는, 단지 물의 순환에 대한 서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의 상태로 삼차원에 현존하는 임의의 물질 및 형태에 대한 조각적 지각과 인식으로 이어져 지난 세기 내내 확장해 온 조각적 개념과도 맞닿게 된다. “투명하고 가는 것들을 일으켜 세우기”라는 이 글의 제목은, 그러한 조각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크고 무겁고 단단한 재료로 총체적이고 선명한 윤곽선을 지닌 조각적 이상을 실현하던 고전적 관습으로부터, 애초에 삼차원의 현실이 증명하는 “불확실성의 현존”에 다가가려 했던 현대 조각가들의 시도를 다시 떠올려 보면, 끝내 온전히 다 볼 수 없음을 전제로 한 불완전한 현존과 대면하게 되는 매순간의 경험은 홍유영이 말하는 ‘Negative Landscape’에 관한 지각과 인식에 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