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건축술 - 리각미술관 관장 이상원
-
2023
리각미술관 관장 이상원
홍유영의 작업 ‘건축술’은 안정적, 혹은 항구적이라는 의미에 대해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안정성과 항구성을 추구한다. 선사시대의 조상들이 안식을 도모하기 위해 신중하게 선택했을 동굴에서부터,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모듈화된 구조를 지닌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건축은 거주자의 입장에서 삶의 편의성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을 지닌다. 목적이 지나치게 부각되면 과정에서의 부작용과 희생은 별 것 아닌 일로 치부되기도 할 터. 작가의 ‘망치’로 조준하고 있는 ‘못’의 위치는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때 홍유영의 ‘건축술’이란 전시 타이틀은 대단히 도발적인 작명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작업을 ‘기억’이라는 단위로 구성되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도시공간이 탈바꿈하는 과정은 무차별적이며 맹목적이다.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영역이 바로 주거형태의 드라마틱한 변화다. 소위 ‘재개발’을 생각해 보자. 엄연히 우리 중 일부가 점유한 삶의 무대이기도 했던 ‘달동네’는 ‘수치스러운’ 항목으로 분류되고, 그 공간들을 난폭하게 밀어낸 자리에는 신축 아파트 단지가 ‘자랑스럽게’ 들어선다. 흔적으로라도 남아 있을 법한, 달동네가 품었던 기억의 ‘증거’들은 건축 폐기물과 함께 가차 없이 매몰되어 ‘인멸’된다. 거기엔 분명 ‘상처’가 남을 텐데, 우린 상처 받지 않는다. 수치스럽거나 자랑거리일 뿐, 상처 받지 않는다는 점이 기이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재건축’ 역시 유사한 작동 원리를 갖게 되므로, 과거를 간직하기 불가능한 파괴적 단절로 빚어지는 상처는 별반 다르지 않다. 홍유영은 우리가 상처 받지 않는 그 ‘상처’를 다룬다.
작가 본인이 거주하던 70년대에 지어진 ‘반포’의 한 아파트 단지. 재건축을 위해 뜯겨 나가고 있는 이곳이 ‘공사현장’이다.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일상의 터전이었다는 특수성이 야기하는 버거움을 극복하고 물건의 ‘채집’과 공간의 ‘기록’이라는 ‘자재’(資材)를 활용하기 위해 ‘사유’(思惟)라는 정신의 ‘중장비’를 동원한다. 이를 통해 ‘장소성’의 다양한 맥락들을 건조하면서도 자유롭게 탐구해 간다. 껍질을 벗겨냈을 때 드러나는 속살처럼 건축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노출되는 모습은 평범한 상상을 넘어서는 형태로 보일 수 있다. 부서진 자재나 유리 파편, 콘크리트 덩이, 가구의 문짝, 용도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지는 도자기와 같은 일상의 사물들, 나무의 줄기나 등걸… 작가는 이처럼 폐기 단계의 건축 부산물들울 재구성하여 ‘정교한 무질서’의 상태로 전시하고 있다. 건축적 마감을 통해 성취한 최적의(optimal) 기능과 시스템은 해체의 과정을 거치면서 불안정한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것들은 우리가 외면하면서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상기하게 하는 유력한 단서들이다. 관객은 그 불안정한 모습을 관찰하며 자신이 지닌 모종의 상처들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다. 작가는 은폐하거나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시선으로 괴사한 피부조직처럼 상처 난 부위를 응시하고 있다. 이를 위한 작가의 건축적 상상력은 구축보다는 분열에 몰입하고 있다. 가구의 단면을 잘라 이면을 드러내고 그것을 기괴하게 조립하거나, 무겁고 거친 콘크리트 덩이를 우레탄이라는 가볍고 유연한 소재로 캐스팅하기도 한다. 또 이식(移植)을 위한 비용과 수고를 감수할 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잘려 나간 나무토막들을 틈을 두고 연결·배치하거나, 숙면을 위한 도구로 고안된 버려진 방충망을 모티브로 ‘INSOMNIA’(불면증)라는 모순적인 작품명의 작업을 조형적으로 설치하는 등의 기발한 방식으로 ‘시공’한다. 우연하게 ‘수집된 오브제’(collected object)는 역설적이게도 이 장소에 이 사물이 놓여야만 하는 필연성을 촉발시킨다. 이렇게 재구성된 사물과 공간은 초현실적 풍경이나 생경한 분위기의 극단을 펼쳐 보인다. 건축 현장처럼 보이는 전시장은 청각적 소음이 소거된 공간이지만, 그 곳엔 ‘시각적 파열음’이 진동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가볍고, 약하고, 가늘고, 위태롭다, 이런 상황들은 긴장의 에너지를 야기하고 나아가 증폭시키며 우리는 이를 감지하게 된다. 하여 조심스럽고 위축된 관람 태도를 갖게 된다. 이 불편한 전시 관람환경은 상처를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홍유영의 작업은 그런 식으로 우리가 소박하게 믿고 있는 자신의 기억과 ‘나’의 정체성에 대해, 가라앉고 있는 여진(餘震)처럼 미세한 균열을 조장하고,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와 같은 느슨한 전복을 선동한다.
우리의 ‘정체성’이나 이를 구성하는 단위라 할 수 있는 ‘기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튼실한 토대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예상보다 많은 천박한 자기위안과 합리화를 위한 거짓 믿음이 도사리고 있다. 꼭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정직하고 냉정한 자기성찰에는 인색하고 미숙하다. 특정 기억이나 사건에 대해 스스로를 자랑하거나 수치스러워할 뿐 상처받지 않는다(‘소셜 미디어’의 활용방식을 상기해 보라). 과거에서 파생한 내면의 상처는 은밀히 감추고, 현재 보여줄 수 있는 선택적 외양을 뽐내듯 과시할 뿐 상처받지 않는다. 우리가 나름 확고하다고 믿는 정체성의 실체는 이처럼 허구적 개념에 가깝다. 성숙하게 자신의 삶을 조망하는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나 지향에 대한 철저한 해체가 요구될지 모른다. 내가 안정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체계가 얼마나 허약하고 위험한 것인지에 대한 전폭적인 인정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재구축하기 위한 유의미한 ‘주춧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처 받는 일은 불가피하다.
깨달음, 또는 진정한 앎을 위해서라면 상처를 지불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상처 받은 마음이 사유의 기본조건이다. 다음은 푸코의 언명. “안정된 삶이 사실은 사유의 적이다. 사유는 곧 다른 사유인데 순응과 안주의 상황 속에서는 누구나 다르게 사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죽음’이란 단어는 일상에서 ‘금기어’가 되었다. 죽음과 상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위에 기술한 세태를 단지 일사불란한 죽음 위에 축조한 화려한 부활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상처 받을 수 없다. 상처 받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 없고, 깨달음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홍유영의 작업은 ‘상처의 기억술’이자 ‘치유의 건축술’이라 할 만 하다.
건축물의 해체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로 엮어낸 우발적이고 불연속적인, 그래서 불친절한 내러티브구조로 ‘재건축’한 이번 전시장을 둘러보며, 우리는 돌연 허물어진 체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곤 넌지시 건네받는 질문 몇가지.
당신은 상처 받을 수 있는가? 당신의 정체성은 온전한가? 그리고 당신의 삶은 여전히 안녕하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