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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리각미술관 관장 이상원홍유영의 작업 ‘건축술’은 안정적, 혹은 항구적이라는 의미에 대해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안정성과 항구성을 추구한다. 선사시대의 조상들이 안식을 도모하기 위해 신중하게 선택했을 동굴에서부터,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모듈화된 구조를 지닌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건축은 거주자의 입장에서 삶의 편의성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을 지닌다. 목적이 지나치게 부각되면 과정에서의 부작용과 희생은 별 것 아닌 일로 치부되기도 할 터. 작가의 ‘망치’로 조준하고 있는 ‘못’의 위치는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때 홍유영의 ‘건축술’이란 전시 타이틀은 대단히 도발적인 작명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작업을 ‘기억’이라는 단위로 구성되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도시공간이 탈바꿈하는 과정은 무차별적이며 맹목적이다.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영역이 바로 주거형태의 드라마틱한 변화다. 소위 ‘재개발’을 생각해 보자. 엄연히 우리 중 일부가 점유한 삶의 무대이기도 했던 ‘달동네’는 ‘수치스러운’ 항목으로 분류되고, 그 공간들을 난폭하게 밀어낸 자리에는 신축 아파트 단지가 ‘자랑스럽게’ 들어선다. 흔적으로라도 남아 있을 법한, 달동네가 품었던 기억의 ‘증거’들은 건축 폐기물과 함께 가차 없이 매몰되어 ‘인멸’된다. 거기엔 분명 ‘상처’가 남을 텐데, 우린 상처 받지 않는다. 수치스럽거나 자랑거리일 뿐, 상처 받지 않는다는 점이 기이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재건축’ 역시 유사한 작동 원리를 갖게 되므로, 과거를 간직하기 불가능한 파괴적 단절로 빚어지는 상처는 별반 다르지 않다. 홍유영은 우리가 상처 받지 않는 그 ‘상처’를 다룬다.작가 본인이 거주하던 70년대에 지어진 ‘반포’의 한 아파트 단지. 재건축을 위해 뜯겨 나가고 있는 이곳이 ‘공사현장’이다.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일상의 터전이었다는 특수성이 야기하는 버거움을 극복하고 물건의 ‘채집’과 공간의 ‘기록’이라는 ‘자재’(資材)를 활용하기 위해 ‘사유’(思惟)라는 정신의 ‘중장비’를 동원한다. 이를 통해 ‘장소성’의 다양한 맥락들을 건조하면서도 자유롭게 탐구해 간다. 껍질을 벗겨냈을 때 드러나는 속살처럼 건축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노출되는 모습은 평범한 상상을 넘어서는 형태로 보일 수 있다. 부서진 자재나 유리 파편, 콘크리트 덩이, 가구의 문짝, 용도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지는 도자기와 같은 일상의 사물들, 나무의 줄기나 등걸… 작가는 이처럼 폐기 단계의 건축 부산물들울 재구성하여 ‘정교한 무질서’의 상태로 전시하고 있다. 건축적 마감을 통해 성취한 최적의(optimal) 기능과 시스템은 해체의 과정을 거치면서 불안정한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것들은 우리가 외면하면서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상기하게 하는 유력한 단서들이다. 관객은 그 불안정한 모습을 관찰하며 자신이 지닌 모종의 상처들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다. 작가는 은폐하거나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시선으로 괴사한 피부조직처럼 상처 난 부위를 응시하고 있다. 이를 위한 작가의 건축적 상상력은 구축보다는 분열에 몰입하고 있다. 가구의 단면을 잘라 이면을 드러내고 그것을 기괴하게 조립하거나, 무겁고 거친 콘크리트 덩이를 우레탄이라는 가볍고 유연한 소재로 캐스팅하기도 한다. 또 이식(移植)을 위한 비용과 수고를 감수할 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잘려 나간 나무토막들을 틈을 두고 연결·배치하거나, 숙면을 위한 도구로 고안된 버려진 방충망을 모티브로 ‘INSOMNIA’(불면증)라는 모순적인 작품명의 작업을 조형적으로 설치하는 등의 기발한 방식으로 ‘시공’한다. 우연하게 ‘수집된 오브제’(collected object)는 역설적이게도 이 장소에 이 사물이 놓여야만 하는 필연성을 촉발시킨다. 이렇게 재구성된 사물과 공간은 초현실적 풍경이나 생경한 분위기의 극단을 펼쳐 보인다. 건축 현장처럼 보이는 전시장은 청각적 소음이 소거된 공간이지만, 그 곳엔 ‘시각적 파열음’이 진동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가볍고, 약하고, 가늘고, 위태롭다, 이런 상황들은 긴장의 에너지를 야기하고 나아가 증폭시키며 우리는 이를 감지하게 된다. 하여 조심스럽고 위축된 관람 태도를 갖게 된다. 이 불편한 전시 관람환경은 상처를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홍유영의 작업은 그런 식으로 우리가 소박하게 믿고 있는 자신의 기억과 ‘나’의 정체성에 대해, 가라앉고 있는 여진(餘震)처럼 미세한 균열을 조장하고,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와 같은 느슨한 전복을 선동한다. 우리의 ‘정체성’이나 이를 구성하는 단위라 할 수 있는 ‘기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튼실한 토대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예상보다 많은 천박한 자기위안과 합리화를 위한 거짓 믿음이 도사리고 있다. 꼭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정직하고 냉정한 자기성찰에는 인색하고 미숙하다. 특정 기억이나 사건에 대해 스스로를 자랑하거나 수치스러워할 뿐 상처받지 않는다(‘소셜 미디어’의 활용방식을 상기해 보라). 과거에서 파생한 내면의 상처는 은밀히 감추고, 현재 보여줄 수 있는 선택적 외양을 뽐내듯 과시할 뿐 상처받지 않는다. 우리가 나름 확고하다고 믿는 정체성의 실체는 이처럼 허구적 개념에 가깝다. 성숙하게 자신의 삶을 조망하는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나 지향에 대한 철저한 해체가 요구될지 모른다. 내가 안정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체계가 얼마나 허약하고 위험한 것인지에 대한 전폭적인 인정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재구축하기 위한 유의미한 ‘주춧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처 받는 일은 불가피하다.깨달음, 또는 진정한 앎을 위해서라면 상처를 지불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상처 받은 마음이 사유의 기본조건이다. 다음은 푸코의 언명. “안정된 삶이 사실은 사유의 적이다. 사유는 곧 다른 사유인데 순응과 안주의 상황 속에서는 누구나 다르게 사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근대 이후 ‘죽음’이란 단어는 일상에서 ‘금기어’가 되었다. 죽음과 상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위에 기술한 세태를 단지 일사불란한 죽음 위에 축조한 화려한 부활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상처 받을 수 없다. 상처 받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 없고, 깨달음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홍유영의 작업은 ‘상처의 기억술’이자 ‘치유의 건축술’이라 할 만 하다.건축물의 해체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로 엮어낸 우발적이고 불연속적인, 그래서 불친절한 내러티브구조로 ‘재건축’한 이번 전시장을 둘러보며, 우리는 돌연 허물어진 체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곤 넌지시 건네받는 질문 몇가지.당신은 상처 받을 수 있는가? 당신의 정체성은 온전한가? 그리고 당신의 삶은 여전히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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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Material and Structure in Urban Space2023홍유영“여기서 분석되는 것은 분명 결코 언설의 최종적인 상태들이 아니라, 최후의 체계적인 형태들이 가능하게 하는 체계들, 그에 관련해 최종적인 상태가 (체계의 출생 장소를 구성하는게 아니라) 그의 변이체들에 의해 정의되는 전최종적인 규칙성들인 것이다. 완성된 체계의 배후에서 형성들의 분석이 발견해 내는 것, 이것은 생기하는 생명 자체, 아직 포착되지 않은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체계성들의 거대한 두께, 복수적 관계들로 차있는 총체인 것이다.”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 (원사: 1969), p.115-116]인간은 공간을 만든다. 만들어진 공간은 본래 계획한 목적과 체계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기능하며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 어떤 공간이 공간으로서 공간성(spatiality)을 갖는다는 것은 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공간성이라는 것은 공간이 공간적 성질을 갖는 특수한 조건을 말한다. 공간적(spatial)이라는 것은 입체적(three-dimensional)이라는 것과 관계는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동일시되어 해석되기에는 생각보다 관계가 복잡하다. 이번 개인전 《Architectonics (건축술)》에서는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 있던 건축물이 차츰 해체되는 순간에 발견되는 공간을 형성하는 새로운 요소 또는 규칙성들을 발견하고 밖으로 끌어내면서 완결되지 않은 거대한 두께의 공간의 형태들을 감각의 층위로 올려 들여다본다.전시장을 들어서자 바로 보이는 큰 벽면에 설치된 (2022)은 서울의 한 철거 현장에서 수집한 여러 개의 실제 나무 몸통과 밑동 등을 일부분 조각하고 표면에 백색 우레탄을 올려 서로 떨어져 있지만 연결이 되는 듯 벽면 위에 길게 설치한 작업이다. 작가가 최근까지 거주했던 거주지가 재건축으로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그곳에서 50년 가까이 자란 나무들이 이식되는 나무와 폐기되는 나무로 분류되고 여기서 폐기되는 나무들을 계속해서 수집해 왔다. 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은 많은 경우 1970년 경 아파트가 건축되던 시기에 심어져 그 높이가 아파트보다 클 정도로 건축물과 세월을 함께하며 점차 공간적으로 지각된다. 수집된 나무들의 부분들을 오목하게 깎아 부드러운 면이 되도록 조각을 하여 나무의 원래 형태와 조각한 부분이 연결되는데 매끈하게 깎인 나무의 끝부분들은 각기 다른 나무의 형태가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간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방식으로 전시장 벽면에 배치된다. 백색 벽면에 설치된 백색 나무들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의 흐름에 의해 나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볼륨과 음영에 의존하여 그 형상을 드러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면서 일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공간적 흐름을 만들어 준다. 오랜 기간 특정장소에서 나무가 갖고 있었던 나무 각각의 고유한 특이성들이 만들어내는 사물의 표상(representation) 즉 그 유한성(finitude)들은 나무 표면이 전부 백색으로 탈색화(decolourization) 되면서 유한성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대상과 인간 그리고 공간 사이에서 확립되는 불안정한 외부적 관계가 개입되면서 새롭게 드러나는 형상에 집중하게 만든다.“아무리 단순한 것일지라도 질서를 확립하는 데에는 ‘요소들의 체계’가 필수 불가결하다. 가령 유사성과 차이가 나타날 수 있는 선분의 규정, 이 선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변이의 유형, 끝으로 위로는 차이가 있고 아래로는 유사성이 있게 되는 문턱이 절대로 필요하다. 질서는 사물들 사이에 사물들의 내적 법칙으로 주어지는 것이자, 사물들을 이를 테면 서로 바라보게 하는 은밀한 망이고, 이와 동시에 시선, 관심, 언어의 격자를 통해서만 존재할 뿐이며, 오직 이 격자의 빈칸들에서만 표명의 순간을 말없이 기다리면서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듯이 심층적으로 드러난다.” [미셀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원사: 1966), p.14]푸코는 (2012)의 서문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1942)의 텍스트 중 중국백과사전에 대한 글에 대해 여러 페이지를 통해 언급하며 인간이 만드는 지식 체계와 사유의 구조주의적 한계점을 주목하고 우리가 친숙했던 사유의 방식에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단순히 신화적인 동물이나 기괴한 동물의 등장으로 인한 알 수 없음 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의 마주침에 대한 것이 아닌 실재 존재하는 것과 상상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나란히 놓일 수 있는 그 질서의 기괴성 또는 기묘함에 주목한다. 또한 전혀 다른 존재물들을 서로 연결할 “공통의 바탕”이나 “사물들이 인접할 수 있는 장소의 부재”를 강조한다. 사물과 공간을 지각하고 의식하는 것은 어쩌면 푸코가 언급한 것과 같이 공통의 장소의 부재 속에서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을 찾아 열어놓는 행위로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은 사유가 부재하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선험 되고 필연적인 연쇄적 관계에 의해 사유되는 사유의 일관성에서 벗어난 지점을 말한다.이렇게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은 만들어진 공간들이 해체되는 찰나에 자리잡고 있던 모든 질서가 필연성을 지우고 병치될 수 없는 자리로 돌아갈 때 극대화 된다. 철거 중인 한 건물의 계단을 올라 계단 끝의 열린 문을 통해 바라본 실내의 풍경은 그 공간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오전을 지나 정오에 가까워 오던 시간,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서 내리는 강한 햇빛을 받아 공간 안의 널브러진 각기 다른 모양의 유리 파편들과 거울조각들은 마치 일렁이는 푸른 바닷물결이 햇빛에 부딪혀 반짝이는 것 마냥 바닥에 흩어져 들어오는 모든 빛을 흡수한 듯 한없이 반짝이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022) “각이 진 유리”와 미술관 미디어 룸에 설치된 (2023)라는 제목의 거울 작업에서는 실제와 상상의 간극에서 드러내는 물질의 새로운 질서와 형상을 그려내 본다. 재건축 현장을 관찰하다 보면 폐기하는 유리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현장 곳곳에서 수집한 다양한 형태의 투명한 유리들을 전부 작은 조각 형태로 잘게 부수고 모아서 네 면의 모퉁이를 지닌 형태를 만들고 중앙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높이가 올라가는 새로운 공간 구조의 각이 진 유리가 만들어 지기도 하고 각기 다른 형태로 잘게 부순 거울들을 빛의 반사를 통해 물질적 공간의 확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공간이 갖고 있던 질서를 벗어나 해체되는 순간 마주하는 물질의 형상은 간혹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던 것에서 벗어나면서 많이 다르기도 하다.재건축 과정에서 공간은 한번에 철거되는 것이 아니라 단계에 따라 공간이 차츰 해체되어 간다. 내부 인테리어를 철거하는 단계에서는 건축물 메인 구조에 붙어있었던 다양한 종류의 공간들이 떨어져 나가 건물 외부에 마치 벗겨놓은 공간의 껍질처럼 힘없이 쌓여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2022)는 철거 중인 한 공간에서 발견한 수납장 문들을 가져와 기하학적 형태로 절단하여 다양하게 잘려진 부분들을 연장시켜 전시 공간에도 일부 설치하면서 열린 입체적인 공간 구조로 확장 시킨다. (2022)와 (2022) 그리고 (2022)에서는 수집한 오브제나 나무들이 기존의 형태와 질서에서 벗어나 특정한 방식과 질서로 공간이 확장된 형태를 발견 할 수 있다. 사물이나 공간이 어떤 덩어리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마치 그 덩어리에 얇게 붙어있었던 껍질을 벗겨 놓은 것처럼 힘없이 쌓여있는 사물이나 공간 상태는 물질이 만들어진 상태 중 가장 연약해진 상태로 보여진다. 이렇게 연약해진 상태의 물질을 이리 저리 건드리다 보면 쉽게 늘어나는 (물질적 또는 개념적) 지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사물들 사이의 질서나 사물의 내재적 규칙성 또는 공간성을 확립하는 것은 존재물의 불연속적인 지점을 찾는 것과 분명 연관이 있다. 공통성을 상실한 이 불연속적인 지점은 푸코가 말하는 “분류상의 왜곡” 또는 “균질한 공간이 없는 도표”를 만드는데 상당히 적합한 공간적 조건이 된다.전시장 중앙에 놓인 길이 6미터의 거대한 플랫폼 위에 설치된 (2023)는 “잃어버린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으로 묘사된 “불면증”이라는 보르헤스의 단어를 떠올리며 도시공간의 생산과 소멸의 간극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질서를 시공간적으로 재해석한 설치 작업들의 연작이다. 좁은 간격으로 절단한 얇은 스텐레스 판재를 길게 전시장 천정에서부터 설치하여 스텐레스 라인 하나하나가 공중에서 움직이듯 내려오면서 보일 듯 말 듯한 공간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 공간구조는 눈으로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가늘지만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순간 드러나게 되는 좌대 위의 얇은 스텐레스 와이어로 확장되면서 철거현장에서 수집한 여러 오브제들 사이를 지나며 연결된다. 이렇게 얇고 가는 시각적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공간은 시각적인 것과 비시각적인 것의 경계의 끝부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몸에 있는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게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내기도 하고 서서히 사라지며 불연속적인 지점을 지속적으로 만든다.사물과 공간의 지각과 사유는 대상의 최종적인 상태나 최후의 형태를 구축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이렇게 사물과 공간이 최종적인 상태나 최후의 형태를 벗어난 상태에서 존재한다면 이러한 사물과 공간들을 사유가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주목해 본다. 사물과 공간은 일련의 내재적 또는 외재적 질서의 관계를 통해서 그 사물성과 공간성이 변화하고 드러난다. 이러한 질서는 푸코가 언급한 “세력 관계의 영역에서 전술적 요소 또는 연합(tactical element or blocks operating in the field of force relations)”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불균질적이며 다공성 구조 체계를 통해서 불안정한 작동을 하며 “한결 같지도 항구적이지도 않은 일련의 불연속적 선분” 위에 대상의 배치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질서를 통해 사물과 공간은 확장되거나 감소하고 느슨하거나 긴장하고 노출되거나 사라지게 되면서 요소들의 체계를 기획하는데 이것이 사물과 공간을 구축하는 또는 사유를 변환하게 하는 건축술(Architectonics)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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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홍유영“어의 순서나 존재를 합리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언어적인 것이며 가설적으로는 이미 ‘도서관’의 어느 곳엔가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 그 단어는 신성한 ‘도서관’이 예견하지 못했고, 그들의 비밀 언어 중 그 어떤 것에도 무시무시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11(원사: 1944), p.107]공간은 많은 경우 만들어진 상태로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우리가 직접 들어가 볼 수 없는 공간들은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특히 (타인의) 주거공간의 경우 내부를 볼 수 있는 경우가 극히 한정적인 경우가 많고 도시공간에서 열려있는 공간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많지 않다. 빽빽하게 들어선 수많은 공간들을 지나치면서 비슷한 외장으로 뒤덮인 건축물들은 우리 시야에서 쉽게 빠르게 사라지곤 한다. 이번 개인전 《dhcmrlchtdj》에서는 재건축 과정에서 해체되는 찰나에 발견되는 공간들의 다양하고 새로운 면들을 좀 더 들여다보며 집중해 본다.50년 가까이 긴 세월을 담고있는 66개의 아파트 건물로 이루어진 큰 단지 안을 가로질러 발걸음을 멈춘 곳은 그곳에 사는 동안 가까이서 오랫동안 관찰해본 적이 없었던 한 아파트 건물이다. 바로 앞 동은 건물의 일부를 부수고 있었고 요란한 현장의 굉음과 온몸을 뒤흔들며 울리는 진동 한가운데 올라선 계단 끝에는 형형색색의 다른 공간들이 각층마다 펼쳐지고 있다. (2022)은 작가가 살던 단지 안의 다른 거주자들의 공간을 촬영한 사진작업들이다. 오전을 지나며 정오에 가까워 오던 시간, 구름 한점 없던 하늘에서 내리는 강한 햇빛을 받아 공간 안의 널브러진 각기 다른 모양의 유리 파편들과 거울조각들은 마치 오래 갖고 있던 귀금속 상자를 떨어뜨린 것 마냥 바닥에서 모래알같이 흩어져 들어오는 모든 빛을 흡수한 듯 한없이 반짝이며 공간을 채운다. 철거가 진행 중이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붙박이 가구 부분들과 예전의 색들을 머금고 있는 다양한 색감의 벽지들은 외부의 삭막한 공사현장의 상황과 대조가 되면서 그 색들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강하게 발산된다. 내부 공간에 들어서자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르고 주위의 소음이 점차 잔잔해지면서 각각의 공간이 온 힘을 다해 내뿜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한때 거주자들이 살고있을 때는 낯선 이들의 공간을 들어갈 수 없어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여러 실체 없는 공간들이 마침내 해체가 되는 찰나에 그 닫혀있던 비밀의 문들이 모두 활짝 열리면서 눈 앞에 펼쳐진다.전시 공간을 들어가자 바로 보이는 큰 벽면에 길게 설치된 (2022)은 10개의 흑백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작가가 실제로 살던 집이 석면 철거를 위해 백색의 비닐 소재 보양재로 공간을 한치도 빠짐없이 전부 싸는 순간을 담은 작업이다. 흰색으로 온통 덮인 내부공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벽을 감싸며 공간 전체를 휘감으면서 무한대로 확장이 된다. 철거된 큰 거실 창문을 통해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은 창 앞을 바로 가로막고있는 흰색 보양재에 빛이 투과되면서 마치 거대한 조명을 켜놓은 듯 실내를 밝혀주고 비닐 특유의 재료적 특성으로 보양재 표면의 반짝임은 시각을 따라다니며 계속해서 움직인다. 급격하게 변하는 도시공간을 마주하게 되면서 언뜻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1944)에서 육각형의 구조로 무한(unlimited) 하지만 주기적(periodic) 질서를 갖고있는 바벨의 도서관(The Library of Babel)을 떠올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공간을 서술하는 텍스트들에 관심이 많은데 특히 이 도서관은 특정시기에 인간이 만들어놓은 공간 이라기 보다는 태곳적부터 존재해오던 공간으로 묘사되어 그 실체에 대해 우리는 전부 알 수 없는 특징이 눈길을 끈다. 도서관의 건축적 구조는 육각형으로 되어있는 벽면 중 네 면에 각각 다섯 개의 책장이 채워져 있고 이러한 진열실은 다른 진열실과 열려있는 구조로 무한대로 연결이 되어 펼쳐진다. 오랜 기간 살았던 공간이 해체되는 순간 목격되는 공간의 다양한 모습들은 마치 바벨의 도서관이 무한 하지만 주기적인 질서로 존재하는 모습과 사뭇 중첩된다. 다른 쪽 벽면에 설치된 (2022)는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모든 철거 과정은 건축물을 철거하기 전 주변의 나무와 식물 그리고 정원과 놀이터들이 먼저 철거, 폐기 또는 이식된다.) 한 때 오래된 아파트 정원의 한 모퉁이를 50년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던 큰 돌을 전시장으로 가져와 설치한 작업이다. 종잇장같이 얇고 긴 직사각 형태의 스텐레스 판재가 큰 돌 아래 바닥을 지나 전시장 한쪽 코너와 맞닿으면서 방향을 틀어 벽면을 타고 올라가면서 선적 구조가 전시장의 벽면으로 이어지도록 설치한 작업이다. 바위나 돌들은 주거환경을 시각적으로 장식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어 왔던 재료들이며 이들은 도로와 정원을 구분하는 등 공간적 지표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공간적 지표를 수행하던 돌은 옮겨진 다른 공간에서 그간 잊고 있었던 그것이 본래 갖고있는 물리적 무게감에 집중하면서 또다른 공간 질서를 만들어낸다. 인성(touchness)은 금속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파손되거나 충격에 잘 견디는 성질, 즉 휘거나 또는 구부렸을 때 금속이 그 힘을 버티는 저항의 정도를 이야기 한다. 이러한 인성이 큰 스텐레스 판재를 좁게 절단하여 구부리고 그 구부림의 정도가 최대치에 달하는 지점에 구조를 고정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공간을 확장시킨다. 사물과 재료 등 대상이 갖고 있는 내재적 특성을 외부로 끌어내어 재료의 힘과 움직임 또는 그 저항하는 (물질적 또는 비물질적) 힘이 최대치인 지점을 찾는 과정은 곧 그 물질의 내부에 내재된 다양한 시간들을 우연한 찰나에 발견하게 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재료를 계획에 맞게 미리 재단하여 목적에 맞게 구축하는 일반적인 건축 방식과는 아주 다르다. 유연한 건축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유연한 건축법(Flexible architecture)은 그 형태, 구조,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상호적 관계가 중요하다. 이러한 상호적 관계는 우연성과 즉흥성에 기반하지만 우연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즉 기존의 대상이 갖고있는 질서나 규칙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이해 되기도 하는데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사고 과정 속에서 그 움직임과 구조를 예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도출되는 지점에 대상을 포착하여 파악하고 변화시켜 구체적인 형상과 관계를 새롭게 결정하며 만들어 준다. 호르헤스가 서술한 바벨의 도서관은 세상의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 동일한 책은 한권도 없지만 수십만 권의 불완전한 복사본이 존재하며 책 커버에 박힌 글씨는 책 내용을 지시하거나 예시하지 않고 책의 내용 또한 태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어떤 언어에도 속하지 않아 불가해하다. 수많은 책들 중 한권에는 내용도 없고 장황하게 길게 늘어놓은 글이 있다. 글자의 조합이나 의미 또는 발음까지 불가능한 글자들의 집합체가 도서관 안의 책들 중 한권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마치 도서관이 예견하지 못한 의미 없고 조합이 불가능해보이는 글자들의 존재처럼 사물이나 공간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확신은 “우리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거나 환영적인(phantasmal) 존재”로 만드는 듯 보인다. 반복적 변화가 일어나는 일상 속에서 그 중 (물질적 또는 비물질적) 해체가 되는 과정 속에서 공간이나 사물들을 좀 더 들어가 보면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발견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있던 특정 단어나 개념으로 명명할 수 없는 순간이나 공간 또는 대상이 분명 존재하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의식과 감각을 정해진 질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만들어 가게 된다. 이러한 지점을 찾아가는 탐구는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된 (2022)에서도 보여진다. 이번 전시 공간은 을지로의 오래된 건축물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전시장의 전면에 자리한 큰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의 움직임이 인상적인데 이러한 전시공간이 갖고있는 특수한 장소적 특성들을 이끌어내어 작품에 연장시켜 본다. 오랜 기간 거주했던 아파트 단지에 나무들은 많은 경우 1970년 경 아파트가 건축되던 시기에 심어져 그 높이가 아파트보다 클 정도로 건축물과 세월을 함께하며 점차 공간적으로 지각된다. 철거 과정에서 수집된 폐기된 오래된 나무 밑동과 몸통들은 실버 크롬으로 도색이 되어 거울 또는 금속의 성질을 드러낸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나무의 표면들은 공간적으로 지각되는데 주변 공간을 끌어 담으며 표면 굴곡에 따라 공간을 변형하며 반영한다. 전시장 중앙에 매달린 여러 개의 스텐레스 메쉬들은 눌리는 힘과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곡선의 움직임과 공간의 깊이 및 형태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연한 금속 라인은 금속 자체가 갖고있는 단단한 재료적 성질을 뛰어넘어 상당히 유연한 형상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반짝임을 덧입고 얇은 스텐 와이어와 체인에 연결되어 거울 같은 나무 조각들로 공간이 확장된다. 움직이는 시각에 따라 드러남과 사라짐이 불분명하게 반복되는 구조는 우리의 감각과 의식을 긴장감과 유연함 사이를 오가며 지속적으로 확장시키며 그간 명명되지 않았던 그 “어떤 공간”과 마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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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홍유영“아주머니의 방이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떠올린 것은 단지 그 잘린 벽면이었다.)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2(원사: 1913), p.91]프랑스 작가인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1913)에서 나레이터는 어머니가 준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프티트 마들렌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여러 번에 걸쳐 먹으면서 그 맛과 향기에 과거의 콩브레에서의 기억들을 차츰 떠올리게 된다. 감각과 사고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그 대상이 갖고있는 흐릿한 실체를 끄집어내려 한동안 몸부림을 친다. 마치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 찾아가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라져 가는 감각을 붙잡으며 그것이 의식의 표면에 이를 때까지 어둡고 불분명한 긴 알 수 없는 상태를 계속해서 지나가면서 텍스트에서의 시간은 순간 과거의 한 시점으로 흘러가서 레오니 아주머니가 살던 방을 지나 마을의 모습 그리고 콩브레 근방의 곳곳이 펼쳐진다. 프루스트는 서술에 있어서 짧은 시간을 아주 길게 늘이기도 하고 긴 시간을 짧게 넘어가기도 한다. 오래전 과거 시점과 현재의 시점의 서술에 있어서 그 시간의 길이가 다르다. 또한 사건이 지속되는 시간의 길이와 그 길이를 통해서 사건 또는 대상의 드러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특히 스토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내용들 보다 서술자의 관점이 부각되면서 서술자의 관점이 투영된 사물과 인물 그리고 사건의 이야기가 확대되거나 요약 또는 생략 되면서 텍스트 안에서 다양한 층위로 드러난다. 지속되는 시간의 길이도 다르지만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오브제를 통해서 서술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적 순서를 뒤바꾸기도 한다. 즉 어느 순간 갑자기 소환되는 여러 인물들과 프랑스 콩브레 지역과 근방, 마을과 건축물과 정원 등의 특정 장소들과 다양한 사물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기억의 파편들이 표면으로 올라와 확장되고 늘어나고 변형된다. 텍스트에 나타나는 시간성은 이러한 변화에 개입한다. 이것은 통시적(diachronic)이며 일련의 역사적(historic) 흐름 안에서의 시간성 이라기 보다는 분열적이지만 순환적 특성을 띄고 있다. 스토리 안에서 일어나는 연속적인 사건들은 분열적인 시간성 안에서 대립되고 반복되고 순환되는 여러가지의 관계들을 만들어 낸다. 스페이스몸 미술관의 《Anachrony》에서는 점차 보이지 않고 점차 사라져가는 주거 공간을 중심으로 감각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 올라가 마침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는 또다른 이야기들을 펼쳐본다. 작가가 태어나고 최근까지 살던 주거지 이자 현재는 재건축으로 철거가 진행 중인 서초구 반포동의 50년 가까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 철거가 시작되기 전부터 오가며 수집한 폐기된 사물 또는 건축물 파편들을 연속적 상태로 끌어내 끊임없이 변형하는 또다른 실존적 형상을 만들어낸다. 한때 어느 누구의 삶과 함께 지속되었고 다양한 시간이 축적된 사물들과 공간들의 사라져가는 찰나를 붙잡아 그 시간의 틈새를 길게 늘여 본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한쪽 벽면을 따라 길게 설치된 (2022)은 현재 철거가 진행중인 서울 반포의 한 아파트 철거 현장에서 수집한 건축공간의 파편들을 재구축한 작업이다. 건축물의 파편들을 수집할 당시 현장은 건물을 부수는 단계는 아니고 실내 주거공간의 인테리어들을 철거하는 단계라서 아파트 건물 외부에는 건축물의 벗겨진 내부 공간들이 힘없이 널브러져 산처럼 쌓여있었다. 이 작업은 한때 오래된 아파트 실내 공간에서 다른 공간 구조를 이루고 있었던 건축 공간의 부분들을 옮겨와 다른 질서로 연결시키면서 연속적으로 늘어놓는다. 이 껍질 같은 공간의 표면을 모아서 수직이 아닌 수평적으로 재구축하고 이를 또다시 전시장 벽면 위에 수평적으로 설치하여 전시장 벽면 공간을 연장시킨다. 이렇게 늘어난 공간들은 프루스트가 (1913)에서 레오니 아주머니와 프랑수아즈가 수다를 떠는 사이 부모님과 함께 들른 콩브레 성당의 아름다움을 무려 열다섯 페이지로 묘사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된다. 한 장소나 사물 등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특정 대상에 대한 장면들은 기억 속에 저장되는데 이러한 기억들과 생각들은 머릿속에 보관될 때 있는 그대로 보관되기 보다 변형된다. 그리고 그것을 현재 시점에 찾아서 다시 꺼내어 볼 때 또 한번의 변형 과정을 거치며 재생산 된다. 프루스트는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이 주변의 사물이나 자연 또는 공간에 갇혀 있고 “그 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고 말한다. 어쩌면 대상의 존재를 인식하는 인간의 사고, 지각과 감각하는 것이 대상의 비물질적 영역을 만드는 하나의 마법 같은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 비물질적 영역은 대상을 지각 또는 감각한 시간과 그것을 사유 또는 상상하는 시간의 간극 사이에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대상을 사유하는 물리적인 시간의 길이와 그 깊이가 반드시 상대적이지는 않겠으나 이 둘 사이에 어떠한 정해진 절대적인 법칙도 없다. 다른 말로 대상의 비물질적 형태는 사유하는 방식에 따라서 계속 변화하고 이는 다시 물질 위에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색의 껍질이 층위를 이루며 켜켜이 덮이게 한다.“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2(원사: 1913), p.86]낮은 높이의 커다란 플랫폼 위에 만들어진 (2022)은 재건축 현장에서 수집한 다양한 오브제들과 이를 공간적 지표로 삼은 복잡한 선적 공간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의 한 공간의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물들은 현재 시점에 소환되어 전시된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을 만들며 새로운 서사를 만든다. 하루 종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그 시간을 타고 함께 움직이는 의식의 흐름 안에 있다 보면 지각하는 대상의 실체와 깊이를 가늠하고자 하는 갈증을 느끼게 된다. 지나온 횡적인 시간과 그 횡적인 시간을 이루는 수많은 시간들의 찰나들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종적으로 확장시키는 지에 따라 그 대상의 보이지 않는 영역이 결정된다. 프루스트는 텍스트에서 불면증의 시간이 “잃어버린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으로 묘사한다. 장소나 공간 또는 사물은 만들어지는데 그 만들어지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대상 자체에 있는 특성을 얼마나 늘어뜨릴 수 있는지 어떻게 늘어뜨리는 지에 따라 대상의 지각의 범위와 그 구체적인 형상이 결정된다. 불면증은 이러한 생산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의 틈새 또는 파열하는 지점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사이의 공백의 시공간을 오가며 대상을 만들고 확장시킬 수 있는 불균질적인 시간적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 문학 이론가인 제라르 주네트(Gerard Genette)의 (1973)에서는 이러한 분열적 특성의 시간성을 아나크로니(Anachrony)라고 규명한다. 소설에서 스토리를 시간적 관점에서 볼 때 이야기는 사건들이 연대순(chronological)으로 정리되지만, 서술(narrative)에서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다. 아나크로니는 서술자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특정 시간적 질서를 말하는데 이는 서술자에 의해 다르게 조정되고 배치된 시간을 이야기 한다. 즉 아나크로니는 연대기적 시간 질서를 벗어난 스토리와 플롯 사이의 존재하는 시간적 불규칙성을 말한다. 이를 통해 장소 또는 사물 등 대상을 사유하는 방식과 유사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시간적 불규칙성은 전시장 한쪽 벽면과 한가운데 놓여진 같은 타이틀의 작업인 (2022)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벽면에 설치된 네 개의 사각 스텐레스 구조는 두 면이 각기 다른 길이로 잘린 형태로 그 경계 안쪽으로는 잘려진 녹색 유리 파편들이 다양한 형태와 층위로 채워져 있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과 다른 기억들이 축적된 각기 다른 유리 파편들은 빛에 반응하며 공간에 연속된 그림자를 만든다. 바닥에 설치된 같은 제목의 다른 작업은 스텐레스 베이스의 가느다랗게 길게 파인 홈 안에 다양한 모양의 수집된 여러 장의 유리 파편들이 수직으로 꽂혀 있는데 각각의 투명한 유리판의 불규칙적으로 깨어진 라인들이 겹겹이 쌓이면서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공간구조와 움직임을 드러낸다. 한데 모인 유리판들은 어떤 각도에서는 완전히 겹치게 되어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지기도 하는데 이렇게 움직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시공간적 불규칙성은 순간적으로 만들어지는 포착의 시간에 대상의 형상을 늘이거나 줄이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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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Munumi (Teawhi Kim)Even in the process of updating a game, the direction of its developers and operators is likely to be present. There is a hidden context in which the player is induced directly or indirectly when adjusting the scoring method winning strategy, and balancing the characters. Nonetheless, some players find new cracks from the intention. They find ways to get out of the huge framework and be more effective in winning. For example, some of the players misuse bugs, and others come up with new strategies by turning the adjusted frame-work to their own advantage. Even if the game is perfectly balanced, it con-stantly requires to update new contents for new entertainment (especially in PC game). Following the updated version, the strategies of players may change little by little, but what rarely changes is the unique set point of each player. The point involves a wide variety of settings, ranging from operations such as shortcuts and mouse sensitivity to graphics settings such as reso¬lution, vertical synchronization, and lay-tracing. Of course there would be those who don’t dwell on such options, but I think it is those settings where we are able to find a specific style. In this sense, this article aims to guess the perspective of each of the three artists (HyunJeong KimBak and EuYoung Hong) who participated in the exhibition《Media, Configuration Setting (2020)》at Seongbuk Young Art Space and suggest a somewhat indecisive similari¬ties. First of all, HyunJeong KimBak seems to find similarities between the pro¬cess of photofinishing and printing, in which a wide-exposed figure settles through a lens, films and prints in some cases, and in the casting process of a sculpture using a frame. This similarity means that it is only the light through which we can see artworks no matter what kind of visual art it is, and the shape of the work eventually gets to be fixed. Although KimBak’s discovery may not be the first, artworks created based on this basis are enough to shake up the established rigid concept of ‘what is photographic’ often stand¬ing for index. The〈Painter Series (2020)〉allows v iewers to appreciate the work comfortably with calming chroma and stable contrast. Woven fabrics of canvas and sleekly printed surfaces can be said to contradict the traditional view, but it is rather denotative sense of balance that it is colliding with. While one unified sense dissolves the distinction of media, it is woven into a new context-image. Thanks to the approach, the〈Painter Series〉has a different grain from other experimental precedent showing explicit resistance to a medium. Naturally on the top of the canvas, there are traces of brush tools instead of brush touches, and instead of applying paint, they simply force to represent photographs with it. For a person held within the conventional con¬cept of the media, the work would make him or her ponder somewhile.For example, the level measurement line in the image that is upright in〈 Navigation(2020)〉, located on the second floor, becomes an index of height. One scale is different from another, such as distinction between photographs and paintings. Isn’t the difference the artist senses while looking at the media is just the difference in degree, such as stairs and gradations that go up anddown to view〈Operator Series(2020)〉? In order to lead viewers to this kind of drastic imagination, KimBak vitalizes the work to actively function, giving the title of the series as ‘painter, printer, operator.’ This desertion gives the option for photography to move into the context of visual images, not being trapped in the traditions that do not borrow the aesthetics of traditional art, such as paintings, plays, and sculptures, or take current situation into account. Even if you do not agree with these preferences, it is hard to deny that the ‘envi¬ronment’ of 2020 is not the same as before under the popularization of digital photography, smartphones, photoshop, and illustrator. Especially for people who are staying in a traditional discourse of photography, it seems inevitable for them to get out of it. A competent theorist, Rosalind Kraus, who has excel¬lent ability to reorganize existing concepts, stated in her book〈A Br ief Studyon Index (1977)〉that a symbolist named Puss could also find the function of index in examples that point to specific indicators, so that Marcel Du¬champ’s〈The Large Glass〉and several abstract pa intings should be included in the category of index. Still, many people misunderstand that the index is a privilege of photography. Because I myself, who was reading the references to write, have made this kind of mistake, clearly, ‘the photographic’ can be refuted and supplemented, because ‘the photos’ are only prominent index, including areas of drawing and symbols, and the concept of ‘index’ is also in the context as argued by Puss. If we Imagine that HyunJeong KimBak defects from the territory of the in¬dex, EuYoung Hong is set free from the index of the territory. Based on the investigation on the specific space, Hong’s works have focused on sculptureand installation. In the solo exhibition《Met iculous Oblivion(2018)》, held at the Yeongeun Museum of Art, the artist’s work brought objects found in the demolished space and placed them in the works, or cast them as urethane. The soft materials used for casting, such as silicon, urethane, and wax, shows vulnerability of the space, while the slanted or curved form shows tension. This tension reflects the housing problems that the artist has in mind. Based on fragments and indexes of symptoms as study room, split housing, and re¬development, the artist forms a unique structure. What she directs is not lim¬ited to the debris that was in the place, but also to the place where the objet was. That is why Hong’s work often gives the impression of being both indic¬ative and relational. The works exhibited in《Media, Configurat ion Setting》 consist of works that combine drawings and symbolism with space. Partialmaterials such as〈First Horned Face(2020)〉are combined using mater ials discovered and collected by the artist in Jungneung 3-dong. The etymology of the title comes from a dinosaur called ‘Triceratops,’ from a conversation between the artist and her mother while investigating Jungneung 3-dong, a redevelopment area with many old houses. The ancient Greek word, triceratops, means ‘tri-cerat-ops’ in English. And the artist combines the concept of an old building that is empty in that the dinosaur’s existence is proven to be a thin fossil. Instead of using casting methods, the vulnerability of hard horns is revealed through vinyl, which is the same flow in that it diagnoses macroscopic dimensions with micro clues like the previous work, which ex¬tracts the impression of the neighborhood from a child’s ignition. Perhaps on fossils with only skeletons left, the artist embellishes the flesh with her imag¬ination. At the same time, the loose-height temporary structure is placed on the level of symbolism as a monument to the residence. In her previous works, the residence problem was the focal point of the work, while this this time, the emotional and subjective weight increased and giving it a pleasant look.〈Arch itecture Without Architect(2020)〉 is a work that combines com¬plex wires unique to old residential areas, such as Jungneung 3-dong, where residents share common land like common garden and place flower pots on many stairs. This work not only presents the structure of space in miniature like an architectural model, but also features a bundle of wires and organicity produced by light.〈A Conversation Between Three Strangers (2020)〉 is a col¬lection of almost all the ingredients from the village. The viewer has a diverse view of the stones placed on the three-sided mirror, which leads the viewer to look at oneself and the space in the reflection. Like segmented perspectives, the artist’s attempt on dividing and diversifying a single dimension stands out. Kraus’ other work,〈A Sculpture in an Expanded Chapter(1978)〉, is well-known for its unique structure. While the aforementioned〈A Br ief Study onIndex〉shows an approach to graft into a new context, the 1978 art icle shines with insight that points out the differences in the area with its unique negativity of “something not landscape” and “something not architecture.” The two artists combine and bind the concepts of different contexts, and present their own insights with reconstructions that shed light on discrepancies within the same context. To see through or separate the insight is the ecology of the image surrounding oneself, which is the context of the previous work. Each piece will be placed in a different environment over time, but it will remain the same as each moment marks its new direction. 지표의 영토, 영토의 지표무너미 (김태휘)하나의 게임이 업데이트되는 과정에서도, 그 게임을 개발진과 운영자들의 방향이 나타 나기 마련이다. 점수 획득 방식이나 승리 전략, 캐릭터에 대한 밸런스를 조정하여, 플레이 어에게 직간접적으로 유도하는 맥락이 숨겨져 있다. 그럼에도 몇몇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틈을 발견한다. 버그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고, 조정된 밸런스를 역이용하여 새로운 전략 을 고안해내는 등 거대한 틀에서 벗어나 승리에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다. 완벽한 균 형이 잡혀있더라도 새로운 재미를 위한 새로운 콘텐츠가 요구되기에, 게임에서는(특히 PC게임에서) 업데이트가 반드시 따라온다. 이렇게 계속 조금씩 수정되는 버전에 맞추 어 플레이어의 전략은 조금씩 변할 수 있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은 플레이어 마다 의 고유한 몇몇 설정값이다. 단축키, 마우스 감도 같은 조작에 관련된 사항부터 해상도나 수직동기화, 레이트 레이싱 같은 그래픽 설정 등 굉장히 다양한 설정이 수반된다. 그러한 옵션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도 물론 존재하지만, 나는 그러한 설정값에서 특유의 플레이 스타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성북예술창작터의 전시《환 경설정》(2020)에 참여한 3인의 작가 중 김박현정, 홍유영 작가 각각의 시야를 추측해보 고, 막연한 공통점을 제안해보고자 한다. 먼저 김박현정 작가는 사진의 현상과 인화 과정에서 광노출한 형상이 렌즈를 거쳐 센서, 경우에 따라서는 필름, 인화지의 유제에 정착하는 일련의 과정과, 틀을 이용한 조각의 캐 스팅 과정에서 형상을 고정한다는 유사성을 발견했다. 이 유사성은 어떠한 시각 예술이던지 간에 빛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것과 작품의 형상은 결국 고정된다는 것을 말한 다. 비록 작가의 발견이 최초는 아니겠지만, 이를 기반으로 생산된 작품은 흔히 지표성으 로 대표되는 ‘사진적인 것 ’이라는 굳어진 개념을 흔들기 충분하다. 작가의〈페인터 시리 즈〉(2020)는 감상자가 작품을 보았을 때 차분한 채도와 안정적인 대비로 편안하게 바 라볼 수 있는 작품이다. 캔버스의 직조된 천의 요철감과, 매끈하게 펼쳐진 인쇄면은 전통 적인 관점에서는 모순적이라 말할 수 있겠으나, 충돌하는 것은 오히려 외연적인 균형감 이다. 하나의 통일된 감각이 매체의 구분을 흩뜨리는 와중에도 이미지라는 새로운 맥락 으로 엮는다. 이러한 접근 방식 덕분에,〈페인터 시리즈〉는 매체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 을 보이는 실험적인 선례와는 다른 결을 갖는다. 캔버스 위에는 자연스럽게 붓터치 대신 에 브러쉬툴의 흔적이 자리하고, 물감을 바르는 대신에 그저 사진을 눌러 펴낼 뿐이다. 작품을 보는 사람이 매체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따금 고민하 게 만든다. 이를테면 2층에 위치한〈네비게이션〉(2020) 속 직립해있는 이미지 속 수위측정선은 높 이에 대한 측정 지표가 된다. 눈금 하나는 정도의 차이로, 사진이나 회화의 구분과 같은 차이와는 다르다. 하지만 작가가 매체를 바라보며 느끼는 차이는〈오퍼레이터 시리즈〉 (2020)를 감상하기 위해 오르내리는 계단이나 눈금과 같은 ‘정도 ’의 차이에 불과한 것 이 아닐까? 이러한 과감한 상상을 시도해볼 수 있도록 작가는 연작의 제목을 pa inter, printer, operator로 부여되어, 작품이 능동적인 차원에서 기능할 수 있게 활력을 불어 넣는다. 이러한 탈주는 사진이 회화나 연극, 조각 등의 전통적인 예술의 미학을 차용하거 나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전통에 갇히지 않고, 시각 이미지라는 맥락으로 넘어가 는 옵션을 건넨다. 이러한 환경설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2020년의 ‘환경’은 디지털 사 진, 스마트폰,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의 대중화 아래에서 이미지의 차원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특히 고착화된 사진 담론에서 머물러 있는 이라면, 벗어날 필요가 있다. 기존의 개념을 새로이 조직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 스는 저작〈지표에 관한 소고〉(1977)에서, 기호학자 퍼스가 ‘이것’, ‘저것 ’과 같은 지시 대명사에도 특정 지시대상을 가리키는 용례에 지표의 기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들어, 마르셀 뒤샹의〈큰 유리〉와 몇몇 추상회화까지 지표의 범주로 포섭할 것을 주문했다. 그 럼에도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은 지표가 곧 사진의 특권인양 오해하기도 한다.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살피던 나 자신도 이러한 실수를 했기 때문에 분명히 말하자면, ‘사진적인 것’은 지표가 돋보일 뿐, 도상과 상징의 영역도 포함되고, 그‘지표 ’라는 개념 역시 퍼스가 주장한 맥락에 놓여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반박되고 보완될 수 있다. 이 전시를 통해서 김박현정 작가가 지표의 영토에서 탈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면, 홍유 영 작가의 경우는 영토의 지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홍유영 작가는 특정 공간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조각 및 설치 작업에 집중해왔다. 영 은미술관에서 열렸던 개인전《치밀한 망각》(2018)에서 작가의 작품은 철거된 공간에 서 발견된 물체들을 가져와 작품에서 배치시키거나, 이를 우레탄으로 캐스팅하였다. 작 가가 캐스팅으로 사용하는 재료는 실리콘, 우레탄, 밀랍처럼 무른 재료로 장소의 취약성 을 보여주면서, 기울어지거나 휘어있는 형태의 구성은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주었다. 이 긴장감에는 작가가 염두하는 주거 문제가 반영되어 있다. 고시원, 분할주거, 재개발 등으 로 나타나는 증상들을 파편과 지표를 소재로 작가는 특유의 구축물을 형성한다. 작가가 지시하는 것은 그 장소에 있었던 파편에 국한하지 않고, 그 물체가 있었던 장소성까지 함 께 불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홍유영의 작업은 지표적이라는 인상과 환유적이라는 인상 도 종종 준다.《환경설정》 전시에 출품한 작업은 도상과 상징 기호를 더욱 공간과 결합 해내는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처음 뿔이 있는 얼굴〉(2020)과 같이 부분적인 소재들 을 작가가 정릉3동에서 발견하고 수집한 재료를 이용해 결합한 작품이다. 제목의 어원은 작가가 노후 주택이 많은 재개발 지역인 정릉3동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엄마와 이야기 하는 아이가 말했던 ‘트리케라톱스’라는 공룡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인 트리 케라톱스를 영어로 풀이하면 ‘세 개의 뿔이 있는 얼굴(Tr i-cerat-ops)’ 이라는 뜻으로, 작가는 이 공룡의 존재가 앙상한 화석으로 증명된다는 점에서 비어 있는 낡은 건축물의 개념을 접목시킨다. 캐스팅의 방법을 사용하는 대신 단단한 뿔의 취약성 은 비닐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아이의 발화에서 동네의 인상을 추출한 이 작품을 통해 전 작처럼 미시적인 단서로 거시적인 차원을 진단하는 점에서 흐름은 같다. 어쩌면 골격만 남아있는 화석에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살을 붙인다. 동시에 허술한 높이의 이 임시 구조물은 거주지에 대한 기념비라는 상징의 차원으로 자리한다. 이전 작품에 포함된 거 주 문제가 작품의 구심점이 되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비중을 높 여, 살가운 시선도 묻어난다.〈건축가 없는 건축〉(2020)은 정릉3동의 많은 계단마다 주 민들이 화분을 두어 공동 정원처럼 공유지를 활용하는 모습과 오래된 거주지역 특유의 복잡한 전선을 묶어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건축모형처럼 공간의 구조를 축소해서 제시할 뿐만 아니라, 전선 다발과 빛이 연출하는 유기성도 돋보인다.〈세명의 낯선 이들 의 대화〉(2020)는 거의 모든 재료가 마을에서 수집된 것이다. 감상자는 삼면의 거울 위 에 놓인 돌을 다양하게 조망할 수 있지만, 그러면서 반사되는 자신과 공간을 바라보도록 유도된다. 분할된 시야처럼, 하나의 차원을 쪼개어 다각화하는 면모가 돋보인다. 크라우스의 다른 저술〈확장된 장에서의 조각〉(1978)은 특유의 구조도로 내용까지 잘 알려져 있다. 앞서 언급했던〈지표에 관한 소고〉가 새로운 맥락으로 접목시키는 접근을 보인다면, 이 글은 ‘풍경이 아닌 것 ’, ‘건축이 아닌 것 ’이라는 특유의 부정성으로 영역의 차이를 짚어낸 통찰력이 빛난다. 두 작가는 각각 다른 맥락의 개념을 일치시키어 묶어내 고, 같은 맥락 내에서의 불일치를 조명하는 재구성으로 자신의 통찰을 선보인다. 그 통찰 은 꿰뚫거나 분리해내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이미지의 생태, 전작의 맥락이다. 각각의 작 품은 시간이 지나면 다른 환경에 놓이겠지만, 각각의 순간마다 새로운 방향을 가리켰다 는 것은 변함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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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Sohyun Ahn (Director, Art Space Pool)Euyoung Hong’s installation tends to give a cordial reception to connection with language. Collected objects, enough that it can be assumed where they have been used, parts of removed buildings, and sculptures, which were cast out from these objects and spaces, are nothing short of delivering a message. They are things forgotten, erased and hidden by capital in urban space and are wary of the secret and great power of capital. However, this great power of capital is nothing new; the indiscrimination of development has been witnessed for a long time. If Hong’s works reach out to invite wariness, there must be a certain apparatus of persuasion. This apparatus is called rhetoric in general language. How can Hong’s installation as a visual object have powers of linguistic persuasion? In other words, by what form of art can these contents, which are already common knowledge, be paid attention to again? This text is about a kind of rhetoric, not the rhetoric of language, but the rhetoric of material and space.In the rhetoric of general language, ‘figure’ is often translated as ‘munchae (which literally means colour of words)’ in Korean; this is not a familiar word, but it is not difficult to grasp its meaning. It is words with colours, that is, a form of expression that is not limited to the delivery of content, when language is grammatically correct. There are many ways to produce this ‘figure’, perhaps by omitting a word, changing its ordinary position, repeating sounds, using a different, more evocative word, or indicating a bigger one by designating only a part of thing. In a word, it is a way of obtaining difference. ‘Figure’ is, therefore, often defined as ‘deviation’ or ‘estrangement’. It is because the colour of words is revived by a special transformation, being distanced from and escaping from everyday common expression. It is also easy to find this estrangement in the objects, collected by Hong. The objects, which once functioned in their own positions, obtain new colour, moving into the exhibition space and being cut, turned inside out, removed and copied. The objects put on the designation that may be called ‘object-figure’.In this exhibition, Elaborate Oblivion, the most recognizable ‘object-figure’ is achieved by ‘casting’. In fact, before we discuss its materials and forms, the act of casting makes by itself the effect of estrangement; this is probably related to images, created by traditional sculptural techniques in an age that talks about the infinite possibility of 3D printing. Anyway, the outcome of casting is somewhat different from things that are just brought. Things, which had different functions, materials and structures, lose their previous distinctive properties in the process of casting; the outcome of casting makes us assume only what the thing was before. Things, therefore, become neutralized. Casting is a method that is not only selected, when the original form cannot be maintained or remained, but that also makes the life of a thing stop at one point and attempt to restart. Casting ultimately projects the fate of loss, disappearance and forgetting to things that were brought out of demolished buildings.Next is the material of casting. Hong used various casting materials including silicone, polyurethane, beeswax and many others. The results, which cast parts of removed buildings, are soft, fragile, light or drooping, giving a feeling of, to use Hong’s words, ‘relaxing power’ to the original objects. However, ‘relaxing power’ does not refer to ‘weakness’. In casting, we do not look only at the result, but recall immediately the original form, which might be different from the outcome. In a gypsotheque, which is a collection of models of plaster casts, the images of the original form of marble are always implied. Relaxing power is, therefore, read as ‘dragging down’ like an anticlimax in rhetoric. In this way, Hong lets us look at the cast objects as dragged down. Each casting material also creates a subtle different rhetoric through its inherent physical characteristics. Two works with the same title, Elaborate Oblivion (2018) correspond to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the exhibition. The beginning is an installation, which is made using cast parts of removed buildings and thin strings; the end is a lump of a fragment of building, which is cast in beeswax and then melted. Silicone is able to produce elaborate casting, as it stretches and transforms easily, but its durability and resilience are not high enough. Hong reveals all the attributes of silicone in the works as much as possible. The texture of the outcome, which is made by pouring silicone into a silicone mould, is perfect, to the extent of thoroughly revealing not only small marks, but also the location of a joint of the mould. This perfection is, however, in complete contrast to the perfection that is generally pursued in casting. By contrast with an object that is generally produced by casting, which looks almost exactly like the original form, or which is cut and refined to begin a new life with its previous appearance, Hong has kept all kinds of splinters as they are. The artist seemed not to be interested in making the cast object the same as its original form, even though the material can be worked elaborately. It is a typical paradox, like its title, letting us down about casting materials. Moreover, the silicone, with which the mould is filled, is, rather, less durable than the object’s original form, as silicone is soft and fragile. Hong’s casting is far from an exact copy or a life extension. Distancing ourselves from the traditional casting makes us estranged from the familiar act of capitalism, which rapidly replaces objects with efficient materials, after erasing traces of changes. Hong places objects to reveal the more fragile characteristics of silicone. Throwing the object onto a hard rock, laying it on the corner of a piece of furniture or a thin string, tightly stretching a string, which is connected to the wall. These sharp and hard things, which contrast with the characteristics of silicone, are extracted from structures that have not yet disappeared or that have already disappeared. This contrast makes us imagine and remember the state of the past, like placing fish fillets together after picking a bone bare. To sustain a thing is to sustain a memory. It is a tension that is made by the artist to resist disappearance, but is fragile like silicone and precarious like furniture. A beeswax sculpture, which is located at the end of the exhibition’s moving line, emphasizes the temporal dimension of fragility. This lump, which is cast a fragment of a removed building in beeswax and melted by heat, also completely erases the traces of time that the original form experienced. This lump becomes blunt in a new environment, losing its perfection. This is a small resistance against the nature of capitalism as well as a prediction of impending surrender. In this way, Hong creates the ascent and descent of meaning through the change and difference of physical characteristics of materials. In a series of installations, under the same title as the exhibition, Elaborate Oblivion, there appear various materials, which are enough to lead one to wonder how these collected objects - steel bars, paints, lights, polyurethane and many others - can be bound by a same title. These materials, however, reveal ‘object-figure’ consistently, even more carefully. A door-like frame leans against old furniture, where marks and scribbles are still found as they are. Only remaining two legs of a bedside table vertically support a glass window from below. This transformation of standing on end is similar to ‘hyperbaton’, which is used to change the order of words to emphasize the meaning of the sentence. A hinge, which is narrowly retained, makes use of omission, not easily putting aside the door frame. Steel structures and abandoned objects in removal sites are painted in a familiar peach colour. This peach colour is similar to the colour of silicone, but painting changes an object, neutralizing it as a formative object, like casting. If the act of casting is, however, the rhetoric of the artist’s unique contrast to traditional expectations of sustaining original forms, painting is closer to drastic irony. Anxiety and depression, which can be caused by an image of ruins, are temporarily suspended by covering the image in a warm colour; the reality of unstoppable development is further emphasized at the end. A thin light is deflected away from and passes by a thin plate attached to the wall. Like the wall, the white plate may be seen as a functional apparatus of the exhibition space or may be difficult to recognize, if there is no light, as it seems to have been added invisibly on purpose. A thin beam of light makes us imagine beyond the additional plate and evokes the past.Another work with the same title uses polyurethane casting. A lump of flexible polyurethane, which is cast as a fragment of destruction, is squeezed into a row of vertically repeated structures, which are assumed to be a part of drawer. Destruction is mostly a case of breaking the tension up, as the space of life should have the tension to protect us. For example, breaking a roof held horizontally above pillars and knocking horizontally and vertically sustaining furniture. In this way, contrary to the fact that destruction is a work that erases powers, which exist for life, Hong verifies the remaining powers, as we can see with our own eyes, obstinately intervening in the process of erasure and using the characteristics of polyurethane. Different heights of lumps on white pedestals are cast from removed fragments in rigid polyurethane, which is light and less transformed. The architectural materials, which once functioned with individual attributes, can be assumed to be where they have been used, but they are neutralized, having similar weights and the same colour. Even though these objects have lost most of their original sizes and weights, they remain as ‘a thing that is worth preserving’. They reveal subtle textures in light and shade and present themselves as the object of careful observation on the pedestals. Here, Hong takes a strategy of displaying the movement of capitalism and suspending it for a while.Hong’s installation makes use of various forms of rhetoric. It is not because she uses objects collected from removal and development sites, but because her methods of selecting and arranging the materials resemble the movement of capitalism, which this movement goes against for a while. This is a linguistic colour that the objects develop. However, the maximum value of object-figure that we can think of is not necessarily limited to the extent of checking and halting the power of capitalism for a while. For example, Hong indicates it by erasing and replacing a number of attributes, which thoroughly existed in each object’s previous existence, and changing the object’s location; this is often called metonymy. The metonymy in capitalism, in which Hong is interested, is already read as an important rhetoric. In the famous discussion of hegemony of Laclau and Mouffe, metonymy is an important method of reading a movement. “We could say that hegemony is basically metonymical; its effects always emerge from a surplus of meaning, which results from an operation of displacement.” Besides oblivion, erasure and concealment, which Hong has been interested in, capitalism has many more specific actions. Things around us can present actions and persuade us. As if we cannot explain every nuance of language with a few techniques of rhetoric, meanings, produced by visual objects, exist in endless quantities. Hong often quotes Guy Debord, who explains how although the total distortion of capitalist perception controls our memory and future, we do not actually yet know the extent of the total distortion. The rhetoric of language is one of the oldest academic areas, but it is still studied, probably because new ways of persuasion are constantly developed and disappear. The rhetoric of material and space that Hong attempts is not thoroughly understood; but it is the same in capitalism, which we believe that we already know fully well. Therefore, an attempt to connect the two is still intriguing. 재료와 공간의 수사학 안소현 (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홍유영의 설치는 언어가 붙는 것을 환대하는 편이다.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가져온 사물, 철거되는 건물의 부분, 그런 것들을 캐스팅한 조각들도 메시지를 전달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그것들은 자본이 도시 공간에서 잊고, 지우고, 감추는 것들로, 자본의 은밀하고 막강한 힘에 대한 경계심을 요청한다. 하지만 자본의 막강함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고, 개발의 무차별성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홍유영의 작업이 경계심을 요청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설득의 장치들이 있다. 일반 언어에서는 그런 장치들을 수사학이라고 부른다. 시각적 대상인 홍유영의 설치는 어떻게 그런 언어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하면, 이제는 상식이 된 내용을 어떤 조형으로 다시 주목하게 할 수 있었을까? 이 글은 일종의 수사학, 언어의 수사학이 아닌 재료와 공간의 수사학에 관한 것이다. 일반 언어의 수사학에서 ‘figure’는 문채(文彩)라고 번역되곤 하는데, 익숙한 용어는 아니지만 가리키는 바를 포착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말이 띠는 빛깔, 즉 언어가 어법에 맞을 때 전달하는 내용에 국한되지 않는 표현의 방법을 가리킨다. 문채를 얻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단어를 생략하거나 평범한 위치를 바꾸거나 같은 소리를 반복할 수도 있고, 연상되는 다른 단어를 가져올 수도 있고, 사물의 부분만을 지칭하여 더 큰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색다름을 얻는 방법이다. 그래서 문채는 종종 ‘일탈’ 혹은 ‘멀어짐’로 정의된다. 일상적인 공통의 표현으로부터 멀어지고 벗어나는 특별한 변형으로 인해 말의 빛깔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홍유영이 가져온 사물에서도 그런 멀어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원래의 위치에서 제 기능을 하던 사물들이 전시장으로 옮겨지고, 잘리고, 뒤집히고, 덜어내지고, 본떠지면서 새로운 빛깔을 얻는다. 사물들은 굳이 따라 이름하자면 ‘물채(物彩, object-figure)’라고 부를 만한 것을 입는다. 전시 《치밀한 망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물채는 ‘캐스팅’을 통해 얻어진다. 사실 오늘의 미술에서 캐스팅은 재료와 형태를 논하기 이전에, 떠내는 행위만으로도 멀어짐의 효과를 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마 3D 프린팅의 무한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이 고전적인 조각 기법이 주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캐스팅의 결과물은 그냥 가져온 사물과는 좀 다르다. 각자 다른 기능, 재료, 구조로 되어 있던 사물은 캐스팅되면서 이전의 모든 구분되는 속성을 잃고, 캐스팅의 결과물은 다만 그것이 이전에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게 할 뿐이다. 즉 사물은 캐스팅되면서 중성화된다. 또 캐스팅은 흔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남겨둘 수 없을 때 선택하는 방법이며, 사물의 생애를 한 시점에서 정지시키고, 애써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결국 캐스팅은 철거되는 건물에서 가져온 사물들의 상실과 소멸과 망각의 운명을 돋보이게 한다. 다음은 캐스팅의 재료다. 홍유영이 캐스팅에 사용한 재료는 실리콘, 우레탄, 밀랍 등이다. 철거된 건물의 일부분을 떠낸 결과물은 무르거나 약하거나 가볍거나 축 늘어져 있어서, 작가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원형인 사물에 비해 한층 “힘을 뺀” 느낌이다. 그런데 ‘힘을 뺀'이 곧 ‘약한'은 아니다. 캐스팅에서는 결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달랐을 원형을 먼저 떠올린다. 석고 캐스팅 모형을 모아놓은 집소테카(gypsotheque) 안에는 언제나 대리석 원형의 이미지가 떠다닌다. 따라서 힘을 빼는 행위는 그저 ‘약함'으로 읽히는 것으로 아니라 마치 수사학의 점강법(漸降法)처럼 ‘끌어내림’으로 읽힌다. 그리고 홍유영은 그렇게 보란듯이 끌어내림으로써 보게 한다. 캐스팅의 각각의 재료도 고유한 물리적 속성으로 미세하게 다른 수사를 만들어낸다. (2018)이라는 제목의 두 작품은 전시의 시작과 끝에 해당한다. 시작은 철거되는 건물의 일부를 실리콘으로 본떠 얇은 끈을 이용해서 설치한 것이고, 끝은 건물 파편 한조각을 밀랍으로 본떠 녹인 덩어리이다. 실리콘은 신축성과 변형력이 좋아서 정교한 캐스팅이 가능하지만, 내구성과 회복력은 그리 높지 않다. 작가는 이 속성들을 가능한 모두 드러낸다. 우선 실리콘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실리콘을 부어 만든 결과물의 표면은 원형의 작은 흠집들 뿐만 아니라 거푸집의 이음매 위치까지 고스란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다. 그런데 이 완벽은 일반적인 캐스팅에서 추구하는 완벽과는 정반대이다. 일반적인 캐스팅에서 떠낸 대상이 원형과 가능한 비슷하게 보이도록, 즉 대상이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새로운 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떠내고 다듬는 것과는 반대로, 작가는 온갖 거스러미들까지 그대로 남겨두었다. 상당히 정교하게 떠낼 수 있는 재료를 선택했음에도 작가는 결과물을 원형과 같아지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보인다. 캐스팅 재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제목처럼 전형적인 역설이다. 게다가 거푸집을 채운 실리콘은 무르고 약해서 오히려 원형의 재료보다 내구성이 더 떨어진다. 홍유영의 캐스팅은 원형 그대로의 복제나 수명의 연장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런 관습적 캐스팅으로부터의 멀어짐은 변화의 흔적들을 일단 삭제한 뒤 재빨리 효율적인 재료로 대체해버리는 자본주의의 익숙한 행태로부터도 멀어지게 한다. 작가는 실리콘의 취약한 속성을 더 잘 드러내도록 위치시킨다. 단단한 돌 위에 드리우기도 하고, 가구의 모서리나 얇은 끈 위에 걸치거나, 벽에 연결된 끈으로 팽팽하게 당기기도 한다. 실리콘의 속성과 대비를 이루는 이 날카롭고 단단한 것들은 철거 현장에서 미처 사라지지 못했거나 이미 사라진 구조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이런 대비는 마치 뼈에서 살을 발라낸 뒤 같이 놓아두었을 때처럼 과거의 상태를 상상하고 기억하게 만든다. 사물을 지탱하는 것들이 기억도 지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사라짐에 저항하도록 작가가 만들어놓은 긴장이지만, 실리콘처럼 취약하고 가구의 파편들처럼 위태롭다. 전시 동선의 맨 마지막에 놓인 밀랍 조각은 그런 취약함의 시간적 차원을 좀더 부각시킨 것이다. 철거되는 건물의 파편을 밀랍으로 캐스팅한 후에 열로 녹여서 만든 이 덩어리 역시 원형이 겪은 시간의 흔적을 완벽하게 떠낸 것이다. 그러나 그 덩어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이내 그 완벽함을 잃고 뭉툭해진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생리에 대한 작은 저항이지만 또한 곧 닥칠 투항을 예감하게 한다. 홍유영은 이렇게 재료의 물리적 속성의 변화나 차이를 통해 의미의 상승과 하강을 만들어낸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설치 시리즈 에는 주워온 물건, 철근, 페인트, 조명, 우레탄 등 어떻게 같은 제목으로 묶일 수 있었는지 의아할만큼 다양한 재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재료들은 일관되게, 심지어 훨씬 더 조심스럽게 물채를 드러낸다. 낙서가 그대로 보이는 헌 가구 위에 문짝 같은 것이 비스듬히 얹혀 있다. 협탁으로 보이는 가구의 다리가 두개만 남아 유리창을 아래에서 수직으로 떠받치고 있다. 이렇게 모로 세우는 변형은 문장의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어순을 바꾸는 ‘전치법(前置法)’과 비슷하다. 또 아슬하게 남아있는 경첩은 좀처럼 문짝의 윤곽을 떨쳐내지 못하게 하는 생략법을 구사한다. 철거현장에 남아있는 철골이나 버려진 물건들에 친근한 살구빛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살구색은 앞서 보았던 실리콘과 비슷한 색이기도 하지만, 본래 페인팅은 캐스팅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중성화하며 조형적 대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하지만 캐스팅이라는 행위가 원형을 지속시키려는 관습적 기대에 대한 작가 특유의 조심스러운 저버림의 수사였다면, 페인팅은 좀더 과감한 반어(反語)에 가깝다. 폐허의 이미지가 불러 일으킬만한 불길함과 침울함을 부드럽고 온화한 빛깔로 덮어버림으로써 잠깐 유예시키되, 결국은 막을 수 없는 개발의 현실을 더욱 부각시킨다. 가느다란 빛이 벽에 붙은 얇은 판 위를 빗겨 지나가고 있다. 벽과 같은 흰색의 판은 일부러 보이지 않게 덧댄 것 같아서 만일 빛이 없었다면 잘 보이지 않았거나 전시장의 기능적 장치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얇은 빛 한줄기 때문에 덧댄 판 너머를 상상하고 지나온 시간들을 염두에 두게 된다. 또 다른 동명의 작업은 우레탄 캐스팅을 이용한 것이다. 서랍장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로로 반복되는 구조의 한 칸에 철거 파편을 캐스팅한 연질(flexible) 우레탄 덩어리 하나가 억지로 끼워져 있다. 삶의 공간들은 어떤 방향으로든 긴장을 가지고 있어야만 우리를 보호해주기 때문에 철거는 대체로 그 긴장을 해체하는 일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기둥 위에 수평으로 버티고 있던 지붕을 무너뜨리고, 수평 수직으로 버티던 가구들을 쓰러뜨리는 일이다. 그렇게 철거는 삶을 위해 존재하던 힘들을 지워버리는 일인데 반해, 작가는 굳이 그 지우는 과정에 개입해서 우레탄의 속성을 이용해 남아있는 힘을 잠깐이라도 눈으로 확인하게 해준다. 높낮이가 다른 하얀 좌대 위에 놓인 덩어리들은 철거된 파편들을 가볍고 변형이 덜 되는 경질(rigid) 우레탄으로 캐스팅한 것이다. 각자의 속성으로 기능했을 건축의 재료들은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지만 모두 같은 색의 비슷한 무게로 중성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사물들은 비록 기존의 크기와 무게를 대부분 잃었지만 '보존될 가치가 있는 것'의 자세를 취한다. 조명을 받아 세세한 질감을 드러내고, 좌대 위에서 주의 깊은 관찰의 대상으로 자신을 제시한다. 여기서도 홍유영은 자본주의의 움직임을 드러내면서도 잠깐 유예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홍유영의 설치는 다양한 수사를 구사한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사용한 사물들이 철거와 개발의 현장에서 가져온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 재료를 선택해서 배치한 방식들이 자본주의의 움직임과 닮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 움직임에 잠시나마 역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물이 띠는 언어적 빛깔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물채의 최대치를 반드시 이 정도, 즉 자본주의의 위력을 확인하고 잠깐 정지시키는 정도로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홍유영은 삶에서는 온전히 존재했을 어떤 부분들에서 그 속성의 일부를 제거하거나 대체하거나 위치를 바꾸어 그것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우리는 흔히 환유라고 부른다. 그런데 홍유영이 관심 갖는 자본주의에서 환유는 이미 중요한 하나의 수사로 읽히고 있다. 라클라우의 저 유명한 헤게모니 논의에서 환유는 그 움직임을 읽는 중요한 독해 방법이다. “헤게모니는 기본적으로 환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헤게모니의 효과들은 언제나 전치작용으로 인한 의미의 잉여로부터 출발한다.” 홍유영이 주목해온 망각, 삭제, 은폐 외에도 자본주의는 더 구체적인 수많은 동작을 한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이 그런 동작을 드러내고 설득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우리가 수사학의 몇 가지 기법만으로 언어의 모든 뉘앙스를 설명할 수 없듯, 시각적 대상이 생산하는 의미는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홍유영은 자본주의의 지각의 총체적 왜곡이 기억과 미래를 통제한다는 기 드보르의 말을 종종 인용하곤 하는데, 사실 우리는 아직 그 총체적 왜곡이 어디까지인지 알지 못한다. 언어의 수사학이 가장 오래된 학문의 하나임에도, 여전히 연구되는 것은 아마도 끊임없이 새로운 설득의 방법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홍유영이 시도하는 재료와 공간의 수사학은 아직 충분히 파악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둘을 묶으려는 시도는 여전히 흥미진진하다.